죽음으로 맺은 ‘두 여인의 사랑’
▲ 김용주와 부둥켜 안고 열차에 몸을 던진 홍옥임. | ||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전봉관 교수가 쓰고 살림출판사가 펴낸 <경성자살클럽>은 당시 사회를 흔들었던 충격적인 자살 사건들을 재구성하고 있다. <경성자살클럽>이 소개한 식민지 시대 경성을 휩쓴 희대의 자살 사건 중 일부를 정리했다.
삼각연애의 말로
“1934년 8월 13일 새벽 4시 상해에서 영국인이 많이 사는 정안사로의 한양옥 이층에서 밝어가는 늦은 여름의 고요한 새벽 공기를 여지없이 깨트리고 은은한 피스톨 소리가 연달아 세 번이나 일어났으니….”
당시 사건을 다룬 <삼천리> 1934년 12월호 첫 부분이다. 비극적인 사건의 주인공은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면 출신 스물여섯 살의 젊은 조선 무희 이상산과 중국 상하이 공동조계 공부국(공동조계의 도로건설과 치안을 담당하던 행정기관) 순사부장인 서른한 살의 영국 청년 바톤. 두 사람을 살해하고 자살한 백인 청년은 독일계 제약회사의 동양선전부장인 서른다섯 살의 독일 청년 웨셀’이었다.
조선의 무희 이상산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큰딸로 태어났다. 가족은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했고 이상산은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홍등가로 팔려가게 된다. 이상산은 거기서 이청해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나라 잃은 망명객인 이청해는 애인을 버리고 상하이로 떠나버렸다.
이상산은 이청해를 찾기 위해 상하이를 찾는다. 하지만 그곳에서 애인을 만날 수는 없었다. 상하이에서 유명한 무희가 된 그녀가 만난 남자가 독일 청년 웨셀. 웨셀의 끈질긴 구애로 동거를 하게 된다. 그러나 동거 5년째 되던 어느날 웨셀의 아내가 찾아온다.
또 한 번 남자에게 속았다고 생각한 이상산에게 접근한 사람이 바로 바톤. 웨셀의 친구로 예전부터 이상산을 흠모하고 있었던 터였다. 배신감에 사로잡힌 웨셀은 이상산과 바톤이 자고 있는 집에 몰래 침입해 둘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잠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결국 자신의 남자를 찾기 위해 상하이에 온 이상산은 백인 청년들과의 삼각 연애의 희생자가 되어 이역 땅에서 한 줌의 재로 돌아간 것이다.
현해탄에 몸던진 커플
윤심덕은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로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던 신여성. 김우진은 목포 백만장자 김성규의 장남으로 와세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극작가. 자살하기 직전 불렀다는 ‘사의 찬미’로 더욱 화제가 되었던 윤심덕과 김우진이 현해탄에서 동반 자살한 사건은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지금도 유명하다. 1926년 8월 5일자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부산으로 향하던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가 쓰시마섬 옆을 지날 즈음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의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는데…(중략)… 남자는 김우진, 여자는 윤심덕으로 밝혀졌다. 관부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그 후에도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살아 있다는 얘기가 한동안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1934년 2월 27일자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열여덟 살 소년 김원세는 그의 가족이 3년 전 이태리를 떠나기 전 로마에서, 일찍이 현해탄에서 정사했다고 전하던 김우진 씨와 윤심덕 씨가 자그마한 악기점을 경영하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김 씨와 윤 씨가 자기 집에서 3개월가량 머물렀던 일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 두 사람 사이에 귀여운 옥동자까지 태어난 것을 보았다고 한다.”
명기 강명화 사건
강명화는 경성 최고의 기생이었다. 백만장자 장길상의 외아들 장병천은 강명화에게 홀딱 빠져, 구애 끝에 그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다. 강명화는 한 번 마음을 준 남자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그를 위해 기생 일을 그만두겠다며 머리채를 자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부처님 앞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남자 쪽 집안에서 기생을 며느리로 맞을 수 없다며 반대했다. 결국 둘은 유학을 빙자해 도쿄로 떠났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기생과 함께 놀아나는 유학생’이라는 소문 때문에 한국 유학생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혈기왕성한 도쿄 유학생들이 풍기문란 죄목으로 장병천과 강명화를 처단하러 온 적도 있었다. 이때 강명화는 부엌에서 식칼을 가져와 왼손 중지를 힘껏 찍었다. 겁에 질린 학생들을 향해 강명화는 “목이 이 손가락같이 잘려 나갈지라도 남편을 떠나지 못하겠으니 여러분은 깊이 생각하십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경성으로 돌아온 후에도 두 사람은 장병천의 아버지의 반대로 부부가 될 수는 없자 어느날 강명화는 온양온천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한탄하며 극약을 먹고 자살하고 만다. 장병천도 그를 못 잊어 “강명화와 합장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얼마 후 자살을 한다. 두 사람의 아픈 사랑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와 소설로 출간되기도 했으며, 1967년에는 윤정희·신성일 주연의 영화 <강명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동성애가 낳은 파국
1931년 4월 8일, 세련된 양장을 곱게 차려입은 스무 살 전후의 신여성 두 명이 서로 부둥켜안은 채 질주하는 열차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육중한 쇳덩이에 부딪혀 육신은 갈가리 찢겨나갔지만 두 여인은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도 꼭 잡은 손만은 놓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 조사 결과 자살한 두 여자는 홍옥임과 김용주로 밝혀졌다. 명문가 집안의 고명딸로 음악가 홍난파의 사촌이기도 한 홍옥임과 부잣집 며느리 김용주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두 사람은 모두 남부럽지 않은 집에서 살고 있었지만 마음은 상처뿐이었다. 홍옥임은 아버지가 딸 같은 여인과 연애를 하는 등의 집안문제로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김용주 역시 혹독한 시집살이와 남편의 외도로 큰 상처를 안고 있었다.
상처를 안고 있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다 동성애로 발전했다. 둘은 처지를 비관해 자살을 시도했으나 처음엔 실패했다. 한강의 찬 강물에 스스로 몸을 던졌으나 마침 지나가던 배에 구조된 것이다. 그러다 두 번째 자살 시도로 열차에 몸을 던져 숨졌다.
소파 방정환이 주관하던 잡지 <별건곤>은 1931년 5월호에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녀들은 철도 자살을 하였나?’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로 실었다. 당시 <별건곤>에는 쟁쟁한 여류명사의 동성연애 경험담을 취재한 기획기사를 종종 실었다고 한다.
류인홍 기자 ledh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