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내가 아닌 경찰이 졌어”
▲ 정원섭 씨는 자신과 같은 피해자들이 많다며 남은 인생은 그들을 도우며 살겠다고 밝혔다. |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조사결과 정 씨의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작됐음을 밝혔다. 경찰의 고문과 증거조작, 회유와 협박으로 인한 증인들의 허위 진술이 정 씨를 성폭행살해범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정 씨는 “나와 같은 형사 피해자들이 꽤 많다”며 “남은 인생은 그들을 도우며 살겠다”고 밝혔다.
한 어린 아이가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된 뒤 범인으로 몰린 정 씨. 정 씨가 잃어버린 오랜 세월을 추적해 보았다.
정원섭 씨는 36년 동안 다시 법정에 서기만을 바랐다. 지난 10월 24일, 마침내 그렇게 갈망하던 소원을 이뤘다. 36년 전 법정에 섰을 때 그는 ‘피의자’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재심청구인’이었다. 법정에서 정 씨의 신분이 이렇게 바뀌기까지는 오랜 고통의 세월이 필요했다.
정 씨는 경찰 간부의 딸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당시 이 사건은 전국민적인 관심사였다. 1972년 9월 27일에 사건이 발생했는데, 내무부 장관이 10월 10일까지 범인을 검거하지 못할 경우 관계자를 문책하겠다는 시한부검거령을 내렸다. 경찰은 범인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됐다. 장관이 지정한 날짜가 옥죄어 왔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경찰은 정확히 10월 10일 정 씨가 범인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는 10월 유신의 비상계엄이 내려지기 직전이었다.
당시 경찰은 “정 씨가 막걸리 한 되가량을 마시고 상당히 취한 상태에서 자신이 경영하던 왕국만화가게 안에서 평소 단골이었던 경찰 간부의 딸을 만나 귀여운 생각이 들어 근처 논둑길로 함께 산책을 나갔다가 순간적인 열정을 일으켜 강간하고 목을 졸라 살해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결정적인 증거가 됐던 것은 정 씨의 자백, 현장에서 발견된 정 씨 아들의 연필과 정 씨 소유로 추정되는 빗, 혈흔이 묻은 정 씨의 팬티 등이었다. 또 주변 사람들의 증언도 잇따랐다. 정 씨는 사건 발생 며칠 전 윤락 혐의로 체포된 일까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정 씨가 구속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무부 장관은 범인을 검거한 수사 경찰관을 특진시켰다.
검찰 수사에서도 범행을 인정했던 정 씨는 체포 후 보름 남짓 지난 후부터는 범행을 부인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백은 경찰의 고문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건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재판 과정에서도 혐의를 줄 곧 부인했지만 정 씨는 결국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교도소에서 정 씨는 ‘어린 아이를 성폭행한 후 살해하고도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 파렴치범’으로 온갖 멸시를 당했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1987년 12월 정 씨는 크리스마스 특사로 가석방돼 출감했다. 그때부터 정 씨는 자신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본격적으로 뛰어다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의 도움으로 1999년 재심을 청구했다. 민변의 변호인들은 정 씨를 유죄로 몰아넣었던 중요 증인 두 사람이 위증을 했다는 고백을 받아내고 이 진술서를 바탕으로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하지만 법원은 “오랜 시일이 경과한 뒤인 현재의 기억보다 30년 전의 증언이 경험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더 구체적이고 정확할 것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재심 신청을 기각했다.
이제 정 씨의 마지막 희망은 진실화해위였다. 그는 2005년 12월에 그동안 수집한 모든 자료를 제공하며 진실규명을 요청했다. 진실화해위는 2년여 동안의 조사 끝에 증거가 조작됐으며 정 씨가 고문 등의 가혹행위로 허위 자백을 했고, 증인들도 경찰의 회유와 강압으로 허위 진술을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정 씨가 피해자라는 것이 진실화해위의 결론이었다.
결국 법원에서 재심 청구를 인정하면서 지난 10월 24일 첫 번째 공판이 열렸다.
진실화해위는 “정 씨를 범인으로 인정하게 된 유력한 증거였던 연필과 빗, 혈흔이 묻은 팬티 등이 조작된 증거였다”고 전했다. 또 “잠을 재우지 않고 식사도 제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경찰봉에 걸어 거꾸로 매달고 얼굴에 수건을 덮은 채 물을 붓는 등의 가혹행위를 통해 자백을 받아냈다”고 덧붙였다.
진실화해위의 조사 과정에서 당시 수사관은 고문 사실에 대해 부정했다. 다만 한 수사관은 “비슷한 시기에 다른 경찰관이 젖은 물수건을 이용해 고문하는 것을 목격한 바 있으나, 이 사건의 고문 여부에 대해서는 목격하거나 아는 바가 없다”고 진술했다.
또한 진실화해위는 사건이 조작됐음을 보여주는 몇 가지 조사 결과를 추가로 밝혀냈다. 그중 하나가 당시 살해된 어린이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주택만화가게 TV 시청 티켓’이다. 정 씨가 운영하던 가게는 ‘왕국만화가게’였던 것. 정 씨는 “숨진 아이는 우리 가게 단골이 아니었다”며 “좁은 동네라 경찰 간부의 딸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고 전했다.
당시 사건 기록에는 살해된 아이에게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체모가 발견된 것으로 돼있다. 국과수의 감정결과에 따르면 이 체모의 주인은 혈액형이 A형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정 씨의 혈액형은 B형이었다. 결국 수사가 조작되지 않았다면 이를 근거로 진범을 찾아야 했지만 경찰은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이 체모는 증거자료로 남아있지도 않았다. 범인을 잡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증거가 사라졌던 것이다.
정 씨는 현재 전라남도 남원시 외곽에 있는 한 교회에 거주하고 있다. 감옥에서 출소하면서 춘천을 떠나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 정 씨는 “당시 어린이가 살해된 장소 주변은 군부대와 정보기관 요원들이 근무하는 곳이 있었는데, 그쪽은 수사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자신을 범인으로 몰았던 증인들과 고문을 했던 경찰관들에 대해서 정 씨는 “내가 벌을 주지 않아도 하늘이 벌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당시 내무부 장관이 시한을 정하고 문책을 하겠다고 지시하면서부터 경찰들이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만약 정 씨가 재심에서 승소를 하면 국가는 적지 않은 액수를 배상해야 한다. 정 씨는 이 돈을 자신과 같은 피해자들을 위해 쓰겠다고 밝혔다. 그는 “시국·공안 사건은 배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 상대적으로 조작이 쉽지 않지만 가난하고 못 배운 일반 형사사건들의 피해자들은 조금만 위협을 가해도 금세 자백을 하는 경향이 있다”며 “그런 이유로 형사사건 피해자들이 시국 사건보다 훨씬 많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류인홍 기자 ledh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