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돌풍 뒤엔 실세들 입김이…
▲ 2003년 1500억 원 규모의 고속철 ATP 사업권 선정을 둘러싸고 정치권 로비 정황이 포착돼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사진은 2004년 개통된 고속철. | ||
검찰은 이 사업 입찰 과정에서 관계사인 A 사의 L 이사의 로비를 받은 정치인들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에 대해 내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관계자에 따르면 이 사건은 애초 민정실에서 제보를 받고 시작됐다. 민정실은 지난해 9월부터 최근까지 조사를 통해 여러 가지 구체적 정황을 확보하고 검찰로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입찰 과정에서도 허위실적 논란 등이 일면서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ATP 사업권 선정 내막에 대해 대검이 내사를 착수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일부에서는 “올 것이 왔다”는 반응마저 보이고 있다.
A 사의 L 이사가 사정당국의 감시망에 들어온 것은 지난해 9월경. 당시 민정실은 지난 2003년 LG CNS 컨소시엄의 일원이었던 A 사가 철도공사(당시 철도청)의 발주 공사에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과정이 석연치 않다는 첩보들을 입수했다. 의혹의 대상이 된 ATP 프로젝트는 열차 운전체계를 기존의 지상 수신호체계에서 차량 내 신호체계로 전환하는 사업으로, 사업비만 1500억 원 규모로 예상돼 업계에선 초미의 관심이 쏠렸던 공사다.
당시 입찰에는 삼성SDS, 현대정보기술, LG산전, LG CNS 등 국내 내로라하는 업체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뛰어들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선정 전에는 유력 해외업체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한 삼성SDS와 LG산전이 가장 앞선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반면 가장 약체로 평가받던 컨소시엄은 LG CNS. 해외 유력업체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한 것도 아닐뿐더러 홈페이지조차 없어 일반인뿐만 아니라 업계에서도 생소한 업체인 바로 A 사가 끼어있었기 때문.
실제로 법인 등기부등본 확인결과, A 사는 지난 1994년 토목 및 건축공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됐고, 전기 전자 철도신호제품의 제조판매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지난 2001년 6월부터였다. A 사는 ATP 사업 입찰에 참여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철도설비 공사에 발을 들여놓은 지 2년여밖에 되지 않은 신생업체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결과는 LG CNS의 승리.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철도공사에서 LG CNS 컨소시엄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던 것.
결국 A 사는 철도관련 사업을 시작한 지 불과 2년 만에 업계 최대의 수주전에서 내로라하는 업체들을 제치고 낙점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낙방’한 업체들로선 승복하기 쉽지 않았다.당시 2순위 대상자로 지정되면서 탈락했던 현대 로템 측(삼성SDS 컨소시엄 소속)은 “LG CNS 컨소시엄 업체들이 제출했던 유럽납품실적이 사실과 다르다”며 조달청과 철도공사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LG CNS 컨소시엄 업체들이 실적을 부풀려 허위 입찰을 했다는 것. 하지만 철도공사에서는 이의제기가 있은 지 단 하루 만에 “확인 결과 납품실적은 사실로 드러났다”며 “로템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일축했다. 이후 지난 2004년 1월 철도공사와 A 사 컨소시엄은 본계약을 맺고 지금까지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목할 부분은 A 사가 지난 2007년 말 있었던 울산-부산 경부고속철도 2단계 신호설비신설공사 입찰에서 허위실적을 제출했다는 이유로 얼마 전 철도시설관리공단으로부터 ‘부정당업체’ 제재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지난 2003년도 입찰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던 업체가 5년간 공사를 하고 실적이 오히려 더 쌓인 상황에서 허위실적 제출로 제재를 당하는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A 사는 현재 진행 중인 ATP 사업에는 여전히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철도공사 측 관계자에 따르면 철도가 신설될 때 들어가는 ATP 시공은 A 사가 맡아서 하고 있다는 것. 이에 대해 철도공사 측 관계자는 “신호설비신설공사는 공단의 사업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관련이 없다”고 답했다. 지난 2003년 A 사가 공사를 입찰할 당시까지만 해도 철도공사에서 통합적으로 관리하던 분야들이 지난 2005년 공단과 공사로 분리되면서 차량분야는 공사가, 건설분야는 공단이 맡는 등 업무가 분리됐다는 것.
이 때문에 철도공사 측에서는 과거 A 사 등의 허위실적에 문제가 제기된 부분에 대해서도 “모른다”고 답했다. 철도공사 측의 한 관계자는 “(2003년도 계약에서 문제점 등에 관한) 사실관계를 알 수 없다”며 “2005년 이후 조직개편이 대대적으로 이뤄져 지금에 와서는 확실한 진상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고 답했다.
또 철도공사 측에서는 허위실적 제재를 받았음에도 철도공사 측의 ATP 사업에 여전히 참여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이번에 A 사가 입찰에서 제재를 받은 신호설비신설공사는 (철도시설) 공단에서 담당하는 것이어서 왜 이번에 부적격업체 제재를 받았는지 정확한 사유가 나와 줘야 우리 쪽에서 대응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허위실적이 문제되기 전에도 A 사는 L 이사가 철도공사 고위급 인사에게 뇌물을 준 사실이 적발돼 구속된 전력이 있다.
확인 결과 L 이사는 지난 2004년 8월 철도공사 고위 관리자였던 이 아무개 본부장에게 1000여 만 원의 뇌물을 줬다가 구속됐고 몇 달 후 보석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당시 L 이사가 뇌물을 준 이유와 ATP 사업권 선정과의 관련성 등에 대한 조사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애초 제보를 받은 민정실에서 주목한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정권이 바뀌기 전 업계 최대의 공사를 수주했던 A 사가 정권이 바뀌면서 부정당업체로 제재를 받았다는 점도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L 이사의 뇌물 수수 혐의가 드러난 후에도 A 사에 대해 아무런 제재조치가 없었다는 점은 A 사에게 든든한 배경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이후 조사에 들어간 민정실은 당시 입찰과정에서 A 사의 실제 사주로 알려진 L 이사가 참여정부 실세 정치인들에게 금품로비를 벌였다는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 측 관계자에 따르면 A 사의 L 이사는 참여정부 실세 정치인들과 평소 상당한 친분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한다.
그중 ATP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L 이사의 금품로비를 받고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의심을 받고 있는 인물은 참여정부 시절 실세로 꼽혔던 S 의원과 Y 전 의원. 이 같은 의혹에 대해 Y 전 의원 측에서는 “L 이사에 대해서는 들어보지도 못했다”며 “나라종금사건, 바다이야기 등 (Y 전 의원이) 수차례 의혹들에 휩싸였었지만 단 한 번도 사실로 드러난 적이 없었다.
의혹이 생길 때마다 구설수에 오르지 않기 위해 더욱 경계하고 조심해 왔다”며 “이번 건도 사실이 아니며 우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답했다. S 의원 측도 “L 이사는 노 전 대통령이 A 사의 고문변호사를 할 당시에 알았던 인물이며 지난 2003년 말경에는 내가 그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면서 “내가 관리하던 인물도 아니고…. 내 이름은 (기사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L 이사는 “S 의원과 Y 전 의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돈을 준) 일은 없다”며 “평가 방법이 투명했던 시절이기 때문에 정치인들을 동원해 공사를 따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라고 답했다. 참여정부 실세 정치인들과의 친분에 대해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과거 90년대 후반, 우리 회사의 고문변호사였다. 그때 사무실에 가니까 그런 양반들(참여정부 정치인들)이 있어서 알게 됐던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 사건을 조사한 민정실은 A 사가 로비에 사용한 비자금을 조성한 구체적 정황도 잡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민정실과 검찰 측 관계자에 따르면 A 사는 L 이사가 등기이사로 있는 B 사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B 사는 A 사의 공사가 있을 때마다 하청업체 자격으로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높은 가격에 공사를 하청받는 식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것.
과연 이번 수사는 어떻게 결론이 날까. 박연차 리스트로 나라 전체가 뒤숭숭한 요즘 이제 막 막이 오른 검찰의 또 다른 수사에 정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