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 세대 기량 차이 커…제2의 류현진·김광현 키워야”
그래서 스포츠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없지만 해외파의 빈자리는 더욱 아쉽게만 느껴졌다. 물론 추신수, 류현진, 박병호 등은 지난 시즌 부상 등의 여파로, 김현수는 소속팀에서의 자리 경쟁으로, 그리고 강정호는 음주운전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바람에 대표팀에서 제외됐었다. 그들이 합류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리란 보장은 없다. 그래도 상대팀 투수들이 부담을 갖고 한국대표팀과 경기를 펼쳤을 거라곤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추신수는 WBC에서 참패한 한국야구에 대해 “정말 화가 난다. 정신차려야 한다”며 강도 높은 발언을 쏟아냈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3일 ‘야구야 고맙다’ 저자 공동사인회에 참석한 추신수.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지난 3월 7일, 2017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대회 A조 1라운드 한국과 네덜란드 경기가 0-5로 패했을 때 미국 애리조나에서 스프링트레이닝 캠프를 소화하고 있는 텍사스 레인저스의 오전 선수단 미팅에서 인상적인 모습이 연출됐다. 텍사스의 3루 코치인 토니 비즐리가 갑자기 추신수를 앞으로 불러 세운 것. 영문을 몰랐던 추신수는 평소 친분이 깊은 비즐리 코치의 요구대로 선수들 앞에 섰다. 그 후 비즐리 코치의 설명.
“오늘 WBC대회에 출전했던 한국대표팀이 네덜란드에 패하면서 1라운드 탈락이 확실해졌다. 한국대표팀을 응원했던 추신수를 위해 우리 모두 묵념하자.”
순간 선수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졌고, 추신수는 어이없는 표정을 하며 묵념은 필요없다고 말하고선 자리로 돌아갔다고 한다.
비슷한 시간에 LA 다저스 캠프에서도 류현진의 이름이 계속 거론됐다. 다저스의 특급 마무리 켄리 젠슨은 기자들한테 “류가 안 보인다. 어디 있느냐”며 찾았다. 다저스 클럽하우스에 설치돼 있는 TV에선 한국과 네덜란드의 경기가 녹화 방송됐고, 미디어에게 개방되는 클럽하우스 오픈 시간 동안 선수들은 물론 현지 기자들도 TV를 통해 한국 대표팀의 경기를 온전히 지켜볼 수 있었다. 류현진은 클럽하우스 문이 닫힐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안방에서 2연패의 수모를 당하며 일찌감치 2라운드 진출에 실패한 김인식호가 대만과의 최종전을 끝으로 2017 WBC대회 서울라운드 일정을 마무리했다. 네덜란드 경기가 있었던 그날, 추신수는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기자에게 “충격적이다”며 안타까운 심경을 토로했다.
―이스라엘과 네덜란드를 상대한 대표팀 경기를 다 챙겨봤나.
“전 경기를 다 보진 못했지만 중요한 부분은 하이라이트를 통해서도 챙겨봤다. 안 볼 수도 없는 게 클럽하우스에 있는 TV에서 계속 틀어준다. 내가 한국 선수이다 보니 선수들이 내 눈치를 많이 보더라. 아마 이겼더라면 신나게 장난을 쳤을 텐데 이틀 연속 패하니까 쉽게 말도 못 걸었다.”
―결국 한국은 도쿄에서 펼쳐지는 2라운드에 올라가지 못했다.
“정말 화가 난다. 그 화가 나는 대상은 KBO이다. 그동안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니었는지 곱씹어봐야 한다. 야구는 점차 세계화되고 있고, 각 대표팀들마다 실력이 향상되고 있다. 2006년, 2009년 WBC대회, 2008년 베이징올림픽,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냈던 대표팀에 취해 있으면 안 된다. 다른 국가대표팀이 오래 전부터 대회를 준비하고, 선수들을 발굴하고 성장시키는 동안 과연 우리는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다. 이렇게 하다 보면 또 다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떤 부분에서 그토록 안타까움을 느꼈나.
“사실 지금은 프로보다 아마추어의 야구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 내가 가장 답답한 부분이 나무 재질의 야구 방망이다. 왜 아마추어 선수들이 나무 배트를 쓰나. 방망이를 컨트롤하는 능력과 힘도 약한데 말이다. 고교 투수들이 130, 135km의 구속으로 공을 던져도 타자들이 그 공을 제대로 치질 못한다. 방망이를 부러트리거나 제대로 스윙하지 못하면서 투수들은 자신이 아주 뛰어난 공을 던진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알루미늄 배트는 스윙폼을 교정해주고, 타격에 힘을 실어준다. 수비할 때도 얼마나 빨리 움직여야 하는지 모른다. 타구가 그만큼 빨리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팀 선수들이 내게 묻더라. 한국에선 아마추어 학생들이 왜 나무 배트를 쓰느냐면서. 여기 있는 선수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왜 알루미늄 배트에서 나무 배트로 바뀌었는지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지만 앞으로 계속 나무 배트를 고집하는 한 한국 야구는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표팀 선수들의 경기 내용에 대해선 하고 싶은 말이 없나.
“사실 선수들은 고생 많이 했다. 모든 스포츠는 과정이 묻히고 결과만 남는 법이다. 그래도 선수들이 개인을 희생하면서 대표팀을 위해 노력한 부분은 인정해줘야 한다. 물론 결과가 좋지 않기 때문에 그조차 비난을 받지만, 나로선 대표팀 선수단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단, 한국 투수들의 투구를 보며 걱정이 든 게 사실이다. 공이 너무 정직했다. 직구라고 해서 포수 미트에 스트레이트로 향해선 안된다. 공 끝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투수들 공이 너무 깨끗하니까 상대팀 타자들이 그걸 쳐내는 것이다. 공의 무브먼트가 정직했다는 게 문제였다고 본다. 특히 메이저리거들이 다수 포함된 네덜란드 대표팀 선수들은 한국 투수들의 공을 상대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오승환을 제외하고는. 투수의 구속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제구와 무브먼트가 중요한데, 대표팀 투수들의 공에선 그걸 찾아보기 어려웠다.”
―문제는 세대교체이다. 1982년생들은 이번 WBC대회를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할 계획인데 82년생들의 빈자리를 누가 채울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솔직히 말해서 대표팀의 신구 세대에 기량 차이가 나는 게 사실이다. 그건 선수들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좀 전에 언급한 나무 배트를 사용하거나 아마추어의 야구 문화가 이전보다 더 성장 발전해 나가지 못한 부분도 존재한다. 김인식 감독님 인터뷰를 보니까 한국 야구에서 제2의 류현진, 김광현 같은 선수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탄하시는 내용에 가슴이 아팠다. 한국 야구의 저변을 이루는 유망주들의 선수층이 점점 얇아진다고 들었다. 중·고교 야구팀들은 뻔한데 프로야구팀은 10개 팀이다. 미국에서 뛰고 있는 내가 이런 얘기를 한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오히려 내 시각이 더 객관적이고 정확한 게 아닐까 싶다. 난 우리 야구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추신수는 KBO와 야구 관계자들이 두 개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국에서만 야구할 것이라면 지금처럼 해도 되지만 국제무대에서 한국 야구의 우수성을 인정받으려면 지금처럼 하면 절대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우리 모두 ‘정신차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추신수는 작심한 듯 강경한 발언을 쏟아내면서 “내가 한 말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적어 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추신수는 한국을 상대로 2점 홈런을 터트린 네덜란드 대표팀의 주릭슨 프로파에 대해 농담 섞인 에피소드를 전했다. 주릭슨 프로파는 텍사스 레인저스의 외야수로 추신수와 친분이 깊은 편이다.
“프로파가 우규민을 상대로 홈런 친 걸 보고 내가 클럽하우스 매니저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프로파가 소속팀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의 라커를 클럽하우스 밖으로 빼놓으라고 말이다(웃음).”
미국 애리조나=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메이저리그 관계자들 한마디 “쇼킹! 그러나 그게 스포츠다!” 애리조나 캠프에서 만난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은 한국대표팀의 조기 탈락에 대해 하나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황재균을 취재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훈련장을 방문했을 때는 한국이 이스라엘과의 경기에서 패했던 그 날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이끄는 브루스 보치 감독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전했다. “한국이 이스라엘을 상대해서 패하는 걸 보고 상당히 놀랐다. 야구가 그렇다. 정답이 없는 스포츠이다. 이기기도 어렵다. 혹시 한국에서도 경기에 지면 감독이 욕을 먹나? 우리 팀은 성적이 안 좋으면 다 내 책임이다(웃음).” 샌프란시스코를 이끌었던 펠리페 알루 전 감독도 한국과 이스라엘과의 경기를 빠짐없이 지켜봤다고 말했다. “경기를 보는 내내 믿기지가 않더라. 이스라엘에선 야구가 유명한 스포츠도 아니고 한국의 프로야구처럼 여러 구단이 있는 나라도 아닌데 한국을 상대로 이겼다. 정말 쇼킹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비록 한국이 패하긴 했지만 자부심을 가질 필요는 있다. 한국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야구하며 성장한 선수들로 대표팀을 꾸렸다. 진심으로 ‘한국대표팀’ 선수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대표팀은 혈통만 유대인인 선수들을 모아 팀을 만들었다. 혈통도 중요하지만 대표팀 선수라면 정말로 그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들로 구성돼야 한다고 본다.” 15년간 샌프란시스코 지역 방송의 스포츠 캐스터라고 자신을 소개한 얼윈 히게로스는 WBC대회 일정에 대한 개선점을 언급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야구를 월드컵처럼 글로벌한 무대에 선보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미국이나 한국처럼 야구를 즐겨보는 나라들보단 이스라엘이나 포르투갈처럼 야구가 여전히 생소한 나라들에 야구를 알려주고 싶어 한다. 문제는 WBC대회 일정이다. 지금처럼 WBC대회를 MLB 정규 시즌 전에 하게 되면 선수들에게 부담이 많이 간다. 선수들한테는 건강과 루틴이 우선이다. 만약 WBC대회에 출전했다가 부상을 당한다면 정규시즌에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다. MLB에선 올스타 게임을 위해 일주일 동안 정규 시즌을 멈춘다. WBC대회도 시즌 중에 치러지는 게 어떨까 싶다. 1라운드를 정규 시즌 개막 전에 치르고, 2, 3라운드는 올스타전처럼 정규시즌 중간에 치르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관중들도 더 재미있게 응원하지 않을까 싶다.” 그는 한국이 이스라엘에 패한데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나타냈다. “야구를 오래 보다 보면 가끔 이런 놀라운 결과를 볼 때가 있다. 이전 월드컵에서 카메룬이 경기에서 이기는 걸 본 적이 있다. 카메룬이 어디에 위치한 나라인지 몰라 세계 지도에서 찾아봤었다. WBC대회가 치러지고 있지만 가장 예상 밖의 결과가 한국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패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스포츠는 원래 그런 것이다.”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