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이계’만 빼고 MB에 보고?
▲ 한상률 전 국세청장. | ||
천 회장은 이미 검찰에 의해 출국금지된 상태다. 국세청은 이번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국세청 주변에서는 검찰 수사의 향방에 따라 현재 공석인 국세청장의 인선 방향이 달라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검찰 수사선상에 전직 국세청 고위 관계자뿐 아니라 현 국세청 고위 관계자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한상률 전 청장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국세청판 박연차 리스트’도 실체가 드러날지 주목된다. 한 전 청장이 대통령에게 태광실업과 박 회장에 대한 계좌 추적 결과를 보고할 때 친MB계 인사의 이름을 빼고 했다는 얘기가 돌고 있기 때문이다.
추부길 전 비서관의 세무조사 무마 로비의 핵심은 추 전 비서관이 박연차 회장의 부탁으로 실제 여권 실세에게 로비를 했느냐 여부다. 현재까지의 정황으로 보면 지난 7월 국세청이 서울청 조사 4국 주관으로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를 실시하자 박 회장이 자신의 현 정권 로비 창구인 추 전 비서관을 통해 국세청에 무마 로비를 시도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한상률 전 청장이 지난 11월 태광실업 세무조사 결과를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보’했고, 현재 검찰수사가 이를 바탕으로 진행된 것으로 미뤄보아 추 전 비서관의 로비는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로비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추 전 비서관이 박 회장과 현 정권 실세 사이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면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일단 추 전 비서관이 한나라당 이상득 의원과 정두언 의원을 통해 세무조사 무마를 시도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의 형이고 정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을 지내던 시절부터 최측근으로 불렸다. 정권창출의 1등 공신으로 꼽힐 만큼 두 사람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는 크다.
이 중 시선을 모으는 인물은 이상득 의원이다. 이상득 의원은 지난 1년간 국세청과 관련한 갖가지 루머에 휘말려 왔다. 국세청은 정권 교체 후 내부 권력다툼이 극에 달했다. 당연히 현 정권의 실세인 누가 누구를 민다는 식의 소문이 파다했다.
‘만사형통’ 소리까지 들었던 이상득 의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4대 권력 기관 수장들의 물갈이 소문이 정가를 떠들썩하게 할 당시 ‘한 전 청장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SD에 줄을 댔다’는 식의 소문이 있었다. 이때는 신성해운 세무조사 무마 의혹으로 국세청이 시끄럽던 때다.
한 전 청장이 물러난 계기가 된 ‘그림로비’ 사건 때도 역시 이 의원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후임 청장에 대한 하마평이 나올 때도 ‘이 의원이 미는 고위급 인사 A 씨가 유력 청장 후보’라는 식의 소문이 국세청 내부에 돌았었다.
이런 소문 때문인지 현재 청장 자리는 몇 개월째 공석이다. 국세청 외부에서는 청장자리가 공석인 이유에 대해서 ‘아직 때가 안 된 A 씨를 앉히기 위해 뜸을 들이고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 미뤄 보았을 때 추 전 비서관은 단순한 ‘징검다리’ 역할에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추 전 비서관이 받은 돈이 수억 원에 불과하다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박연차 회장이 그토록 중요한 일에 그 정도의 로비만 했을 것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게 검찰 쪽과 정계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대신 추 전 비서관과 잘 통하는 실세 중에서 누군가가 어떤 형태로든 국세청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검찰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이 의원은 이 와중에서 의심을 받고 있는 것. 추 전 비서관이 이 의원을 통해 MB캠프에 들어갔을 만큼 친분이 깊은 관계로 알려졌기 때문이다.또 하나, 앞서 언급한 A 씨가 태광실업 세무조사 무마 로비 관련 검찰 수사선상에 오른 것도 의문을 더하고 있다. 정치권에선 이 의원이 평소 친분관계가 두터운 A 씨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추부길 전 청와대 비서관 (왼쪽)과 이상득 의원. | ||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선 이를 두고 검찰이 두 의원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없지 않다.현재 국세청에 쏠린 모든 의혹을 풀 수 있는 열쇠는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쥐고 있다. 알려졌다시피 한 전 청장은 태광실업 세무조사를 직접 주도했다.
때문에 그는 당시 실제 세무조사 무마를 위한 로비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누구를 통해서였는지 등을 정확히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전 청장은 박연차 게이트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기 바로 전 뉴욕으로 출국했다. 주변에서는 공부를 하기 위해 떠났다고 하지만 그 시점 자체가 절묘하다.
한 전 청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임명된 권력기관장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채 정권교체를 맞이했다. 유임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았던 것은 당연했다. 이 와중에서 현정권의 재신임을 받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고 여러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교 동창인 정화삼 씨가 운영하는 제피로스 골프장에 대한 전격 세무조사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는 얘기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즐겨 찾던 모 삼계탕 집에 대해 일반 음식점치고는 제법 큰 액수의 추징금을 물렸던 것을 놓고도 말이 많았다.
회심의 카드는 지난해 7월부터 실시된 박연차 회장의 태광실업과 정산 CC에 대한 세무조사였다. 당시 세무조사는 부산국세청이 아닌 서울국세청 조사 4국이 담당했다. 국세청은 이때부터 4개월간에 걸쳐 박 회장에 대한 광범위한 계좌추적에 나섰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11월 초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보했다. 청와대 민정라인도 건너뛰었다. 당연히 민정실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보니 이 리스트에는 당시 민정수석이던 이종찬 변호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직보를 받고 대단히 흡족해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자료에는 박 회장이 386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 등 친노 직계 인사들, 민주당 의원은 물론이고 한나라당 의원들에게도 돈이 건네진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 자료에는 친이계 정치인들은 없었다는 후문이다.
보고를 받은 이 대통령은 “검찰에 넘겨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성역 없는 수사를 하도록 하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새어나온 정치권의 박연차 리스트에는 친이계 의원도 여러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통령에 보고된 리스트와 정치권의 리스트가 달랐던 것이다.
때문에 한상률 전 청장이 청와대에 보고서를 올리기 전 로비를 받았을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한 전 청장이 로비를 받고 대통령에게 올리는 리스트를 놓고 ‘옥석 가리기’를 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치권의 리스트가 조작됐을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현재의 수사 추이로 보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더구나 당시 한 전 청장은 여권 실세들의 ‘힘’을 필요로 했던 시기라는 점에서 이 같은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의혹도 한 전 청장에 대한 검찰 조사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풀리기 어려울 전망이다.
현재 국세청은 검찰 수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 전 청장은 물론이고 현 고위층에게까지 수사망이 좁혀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국세청은 다시 한 번 거센 후폭풍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기관장들이 잇따라 추문으로 물러난 데다 이번에는 권력형 게이트에 또 다시 고위 인사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국세청.정치권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어떻게 마무리되느냐에 따라 국세청장 인선이 전혀 새롭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국세청이 검찰의 수사를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는 이유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