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 속의 참모냐 실세 쫓는 철새냐
‘비선 실세’로 지목된 정윤회 씨가 세월호 참사 당일 역술인 이세민 씨를 만난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위치한 이 씨 자택. 구윤성 기자 kysplanet@ilyo.co.kr
국내 한 대기업 계열사 임원은 얼마 전 평소 친분이 있는 법조인으로부터 현 정권 실세와 친분을 쌓아두면 승진이 가능하다는 언질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법조인으로부터 소개받기로 한 인물은 다름 아닌 역술인 이 씨였다. 이 임원의 귀띔이다.
“이 씨가 정윤회 씨와 막역하다고 들었다. 솔직히 처음엔 믿지 않았다. 그런데 나 외에도 여러 번 인사 민원을 쉽게 풀어줬다고 했다. 또 주선자를 통해 전해오는 말 중에선 일반인들은 접할 수 없는 고급 정보들이 많았다. 이 씨는 또 우리 회사의 주요 현안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반신반의했는데 최근 언론을 통해 이 씨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순전히 거짓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이 씨가 지난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 당선을 위한 사조직을 운영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 씨는 역술과 관상에 정통하고 예지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씨를 찾았던 ‘단골’ 중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정·재계 유력인사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 씨가 이들을 중심으로 세력화에 나선 것은 2011년 무렵인 것으로 전해진다. 2012년 대선을 한 해 앞두고 사조직을 발족한 것이다.
이 씨가 조직을 이끌며 당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는 않는다. 그러나 이 씨로부터 역술을 배웠다는 한 종교인은 “대략 50명 안팎으로 구성돼 있다. 기업인이 대부분인 것으로 들었다”면서 “이 씨가 박 대통령 당선을 예언하면서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것을 이들에게 강조했다고 한다. 따라서 친 박근혜 성향 조직인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부터 주요 결정을 비선조직과 논의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끊임없이 받았다. 현 정부 출범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마다 논란의 중심엔 정윤회 씨가 있었다. 정 씨가 박 대통령 비선라인 핵심이라는 것은 정치권에서 공공연한 비밀로 통했다. 그러나 이 씨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만큼 이 씨가 은밀히 움직였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씨가 만든 조직이 비선라인의 실체가 아니냐는 의구심도 고개를 들고 있다. 앞서의 종교인은 “둘(정 씨와 이 씨)이 친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 이 씨는 종종 정 씨가 자신에게 의존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중요한 일이 있으면 사전에 찾아와 상의를 한다는 것이었다”며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씨가 정 씨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고 귀띔했다.
이 씨가 세간에 알려지게 된 것은 정 씨가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부터다.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이 정 씨를 만나고 있었다는 소문을 언급한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에 대한 명예훼손 고발 사건에서 검찰은 8월 초 정 씨를 불러 그 진위를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정 씨가 4월 16일 4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는 역술인 이 씨에게로 스포트라이트가 쏠렸다. 언론을 비롯해 정치권과 사정당국이 동시에 이 씨를 주목하고 있는 것은 단지 정 씨와의 관계 때문만은 아니다. 박 대통령 그림자로 불리는 정 씨의 의사 판단에 조언을 해주고 있는 이 씨가 실제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정 씨가 검찰 수사를 받을 때 이 씨 존재를 숨기려 했다는 의혹은 오히려 이 씨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정 씨는 8월 초 1차 수사에서 “4월 16일엔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라고 진술했다. 그런데 검찰이 정 씨 휴대전화 통신기록을 추적한 결과 정 씨가 종로구 평창동에서 통화한 기록이 잡혔다. 검찰이 전화 통화로 이뤄진 2차 수사에서 이를 추궁하자 정 씨는 “사실 이 씨를 만났다”며 말을 바꿨다.
정 씨는 이 씨와의 만남을 털어놓지 않은 것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설득력은 떨어진다. 그날의 정 씨 행적을 놓고 국민적 관심이 쏠려있을 뿐 아니라 외교 문제로까지 불거질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오히려 정 씨가 이 씨를 공개해선 안 되는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야권은 이 씨가 정 씨와의 친분을 활용해 이권에 개입했거나 인사 청탁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미 이 씨가 한 사업가에게 특혜를 보장하며 금품을 요구했다는 주장이 몇몇 언론을 통해 제기된 상태다. 이에 대해 이 씨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현 정권 인사들과 특별히 친분을 쌓은 적이 없고 이권 청탁을 한 적도 없다. 정윤회를 소개해달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내가 다 거절했다”며 부인했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중진 의원은 “이 씨는 지인들에게 ‘정윤회 씨가 세월호 참사 당일 만났다는 역술인이 바로 나’라며 오히려 현 상황을 이용하고 있더라”면서 “정 씨에게 줄을 대기 위한 정·재계 인사들이 이 씨를 방문한 사례를 수집 중에 있다. 인사 청탁과 같은 부적절한 얘기가 오갔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씨 과거 행적은 이러한 의혹을 더욱 키우고 있다. 이 씨는 2000년대 초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와의 친분을 내세워 주변 사람들에게 ‘민원을 해결해주겠다’고 말해 여러 차례 조사를 받은 바 있다. 2006년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하기도 했다. 당시 이 씨는 한 여성 사업가로부터 “재판 중인 동거남이 법정구속 되도록 힘을 써 달라”며 수억 원을 받은 사실이 유죄로 인정받았다. 이러한 과거 사례에 비춰봤을 때 현 정부 들어서도 이 씨가 최고 실세인 정 씨를 ‘활용’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야권 주변에선 이 씨에 대한 현 정부 비호설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앞서의 중진 의원은 “이 씨가 정윤회를 여러 차례 언급했던 것은 팩트(사실)”라며 “박 대통령 이름도 얘기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도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사전에 이 씨를 몰랐다는 건 납득이 안 간다. 그랬다면 직무유기다. 오히려 알면서도 모른 체했을 가능성에 손을 들어 주고 싶다”고 주장했다.
과거 정권 청와대 민정팀에 몸담았던 사정당국 관계자 역시 “이 씨 정도면 관리 대상자에 포함돼 있을 것으로 본다”면서도 “다만 민정이라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정권 차원에서 건드릴 수 없는 인사들이 있다. 민정에서 이 씨를 알고도 컨트롤하지 못했다면 그런 경우”라고 설명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정윤회-이세민 인연은 박 대통령 재보선 때 대구 달성 출마 권유 역술인 이세민 씨와 정윤회 씨가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오랜 칩거를 깨고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지역구를 두고 고민하는 것을 본 정 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학계 인사를 통해 용하기로 소문 난 이 씨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이 씨는 정 씨에게 “어디를 나가도 당선될 것”이라며 박 대통령 고향인 대구 달성 출마를 권유했다고 한다. 2010년 5월 20일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지역구인 대구 달성에서 지원유세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역술인들 사이에서는 이 씨가 박 대통령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다는 말이 돌기도 하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이 씨로부터 역술을 배웠다는 한 종교인은 “이 씨가 정윤회 씨 얘기는 가끔 했지만 박 대통령 부친과 관련해서는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은 없다”고 털어놨다. 이 씨는 현 정권 출범 후에도 정 씨를 정기적으로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두문불출했던 정 씨였기에 둘의 친분을 짐작케 한다. 이를 놓고 정치권에선 정 씨와 이 씨가 비선 실세로서 인사 또는 이권 개입 등을 논의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둘은 검찰 조사 등을 통해 “역술 등 학문 얘기를 나누는 사이일 뿐”이라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동] |
이세민의 단골들은 누구? 중견 여성 탤런트 J 자주 나타났다 역술인 이세민 씨의 철학관은 부촌 평창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북한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얼핏 보면 가정집처럼 보이지만 인근 주민들에 따르면 고급 승용차들이 수시로 들락거릴 뿐 아니라 가끔 노래나 목탁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씨를 직접 봤다는 목격담은 들을 수 없었다. 이 씨가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가 총재로 있는 한 연구단체가 지난해 3월 주최한 행사에서다. 당시 이 씨는 자신이 30년간 연구해 직접 개발했다는 한정식 코스 요리를 참가자들에게 선보이기도 했다. 이 씨를 찾는 주요 고객은 대기업 임원 또는 그 부인이고, 정치권과 연예계 종사자들도 포함돼 있다. 또한 이 씨는 내로라하는 재벌가와도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대기업 총수가 이 씨의 관상 평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백지수표를 제시했다는 일화도 들린다. 호남형인 이 씨는 언변까지 뛰어나 따르는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 정권 실세들과의 친분까지 더해지면서 이 씨 주변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단다. 이 씨는 평소 지인들과의 모임에 자신의 인맥을 과시할 만한 인사들을 대동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중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중견탤런트 J 씨가 자주 나타났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제3자가 보기에 둘 사이는 상당히 가까워 보였다고 한다. 사정당국의 한 고위 관계자 역시 “이 씨 행적을 쫓다 보니 J 씨 이름이 나왔다. 이 씨와 J 씨를 같이 봤다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고 전했다. [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