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풍’에 올라탄 후 ‘태풍’ 맞았다
▲ 지난 6일 대검 직원들이 박연차 회장의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과 관련해 서울지방 국세청 별관 조사4국 3과에서 압수 수색한 물건을 들고 밖으로 나오고 있다. 작은 사진은 한상률 전 국세청장. 연합뉴스 | ||
국세청이 이런 위기에 직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일부에서는 국세청에 대한 외풍과 여기에 편승한 일부 수뇌부의 권력 지향적 행태를 그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위기를 맞은 국세청의 정권 교체 이후 발자취를 살펴봤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은 노무현 정권 말 청장에 임명됐다. 정권이 바뀌면 권력기관장도 운명을 같이하는 게 그 동안의 관례였다. 하지만 당장 국세청장을 갈아치우기에는 마땅한 후임자가 없었고, 내부 승진시킨 한 전 청장을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교체하기엔 명분이 약했다. 게다가 한 전 청장은 제법 능력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부에서 받고 있었다. 여기에서 정권의 딜레마가 생겼다. 교체하자니 대안이 없었고 계속 가기에는 어디가 모르게 찜찜한 구석이 남아있었다.
반대로 한 전 청장에게는 기회였다. 그는 ‘난 전 정권과 연관된 정치적 인물이 아니다’라는 점을 새 정권에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를 보여주기도 전에 곧바로 악재가 터졌다. 한동안 국세청을 시끄럽게 했던 ‘신성해운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이 제기된 것.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집사라 불리는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 비서관이 연루됐다는 의혹이 나왔고, 전 정권 실세라 불리는 정치인들의 이름이 불거져 나왔다. 현 정권에게는 구미가 당길 만한 ‘꺼리’였다. 문제는 국세청 고위직의 이름도 여럿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국세청을 향한 언론의 십자포화가 쏟아졌고 수장인 한상률 전 청장의 교체설이 흘러나왔다. 한 전 청장으로선 현 정권의 신임을 받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런 절박함 때문이었을까. 지난 한 해 전 정권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회사 중에서 몇 개 회사가 세무조사를 받았다. 박연차 회장의 태광실업은 물론이고, 노 전 대통령의 친구가 대표로 있었던 제주 제피로스 골프장, 노 전 대통령이 허리수술을 받은 ‘우리들병원’도 대상에 포함됐다. 국세청에서는 ‘정기조사’라고 밝혔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그 조사 대상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너무 선명했다.
▲ 한상률 전 국세청장. 연합뉴스 | ||
국세청은 이 전 특보와 관련된 자금흐름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토속촌을 세무조사 대상에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토속촌은 10억 원이 넘는 추징금을 올해 초에 낸 것으로 전해진다. 때문에 주변에서는 ‘국세청이 일개 음식점까지도 전직 대통령과 연관됐다는 이유로 세무조사를 한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국세청 관계자는 “해외에 진출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영업이 잘 돼 한낱 음식점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어쨌든 토속촌 측에서는 전 정권과 가깝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된서리’를 맞았다고 보고 있다.
전 정권과 연관된 회사만 세무조사를 받은 건 아니었다. 정권 교체 후 MB 정권과 KBS 정연주 전 사장의 힘겨루기가 한창일 때 국세청은 KBS 외주제작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 당시엔 ‘촛불 여론’의 진원지였던 인터넷 포털에 대한 세무조사도 실시했다.
국세청은 모두 정기조사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세무조사는 한상률 전 청장이 현 정권의 재신임을 받기 위해 벌인 ‘정치적 조사’라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했다. 물론 전 정권 사정작업이 국세청만의 몫은 아니었다. 검찰과 감사원도 일정 역할을 수행했다.
국정원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국세청장. 4대 권력기관장이 모두 전 정권에서 임명되었기 때문에 정권 교체 후 ‘누군가 하나는 바뀔 것’이라는 소문이 정치권에 파다했고 이는 어떤 면에서 당사자들의 충성 경쟁을 유발하는 계기가 됐다.
결국 다이너마이트 심지에 불을 지핀 것은 국세청이었다. 바로 지난해 7월부터 시작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가 그것이었다. 당시 세무조사는 한 전 청장이 직접 진두지휘했고 이를 조사 4국장이었던 조 아무개 현 법인납세 과장이 받아 조사 4국 3과에서 실시했다. 조 과장은 보안에 각별히 신경 썼고, 그 결과를 직속상관인 서울청장을 뛰어넘어 한 전 청장에게만 보고했다. 이 와중에 한 전 청장과 당시 서울청장 간의 갈등설이 국세청 내부에서 터져 나오기도 했다.
태광실업 세무조사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줄에 엮인 굴비처럼 전 정권 인사들의 이름이 연달아 나왔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국세청으로서는 다소 부담스러운 현 정권 인사들의 이름도 나왔다. 한 전 청장의 고민이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 태광실업 세무조사에서 나온 현 정권 인사들이 어느 선까지인지는 한 전 청장과 직보를 받은 이명박 대통령 외에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국세청 자료가 검찰로 넘어갔고 이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소환까지 불러온 ‘박연차 게이트’의 단초가 됐다. 현재까지 드러난 것은 한 전 청장이 애초에 보고받은 리스트와 국세청이 검찰에 수사자료로 넘긴 리스트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박연차 게이트를 수사 중인 검찰은 지난 6일 서울지방국세청에 대한 압수수색에서 이른바 박연차 리스트의 원본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애초 서울지방국세청 조사 4국에서 작성한 세무조사 결과보고서는 모두 5개 항목으로 돼 있었으나 이 중 3개 항목만 검찰에 제출됐다는 것이다. 나머지 2개 항목에는 현 여권 인사와 전·현직 검찰 간부 등 권력기관 인사들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권 교체 후 국세청의 역할은 ‘징세’보다 ‘사정’에 가까웠다는 게 국세청 주변의 평가다. 물론 일반 징세 등의 활동은 정상적으로 이뤄졌지만 전 정권에서 한동안 약화됐던 사정기능이 대폭 강화됐다는 것이다. 그 근저에는 ‘높은 곳’을 향한 고위직의 충성경쟁이 자리 잡고 있다. 징세 기관인 국세청이 ‘정치적’ 색채를 띠거나 휘둘리게 되면 부작용은 피할 수 없다. 이번에 실시한 검찰의 압수수색은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결과라는 지적이 많다.
현재 국세청장은 4개월 가까이 공석이다. 이 와중에도 청장 자리를 둘러싼 내부의 신경전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야말로 ‘외우내환’의 위기를 맞은 국세청이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