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26일 목포시청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마무리 발언을 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
그러나 이번엔 두 사람이 서로의 정치적 ‘뿌리’를 문제삼아 격돌하면서 맞서고 있어 이전과는 대립의 양상이 크게 다르다는 것이 정치권의 평가다. 박 대표가 ‘색깔론’이란 비판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의 정체성을 비판한데 대해 노 대통령은 박 대표의 ‘정치적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유신시대의 어두운 과거를 거론하며 나섰기 때문이다.
특히 정체성 논란이 과거사 규명 공방으로 전선이 형성되면서 “과거를 따져 편가르기를 하는 것은 나라의 뿌리를 흔든다”(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 “썩은 뿌리와 가지를 잘 정리해줘야 나무가 건강하게 자란다”(열린우리당 김현미 대변인)는 ‘뿌리 논쟁’까지 곁들여지고 있는 상황이다. 양측간 ‘사상전’은 특별한 상황변화가 없는 한 ‘하한 정국’을 계속 뜨겁게 달굴 것이라는 것이 정치권의 예상이다.
박 대표가 1주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2일 업무에 복귀하자, 이번엔 노 대통령이 2일부터 9일까지 휴가에 들어가 두 사람이 직접 부딪히는 일은 당분간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여기서 밀리면 죽는다”는 각오로 공방을 확대재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박 전쟁’으로까지 불리는 정체성 공방의 배경과 양측의 손익계산이 어떤지를 분석해 봤다.
우선 정체성 공방에 대한 노 대통령의 입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일전불사’의 강경론으로 흐르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전남 목포에서 열린 광주·전남 지역혁신발전 5개년 계획 토론회를 통해 “지금의 정치적 전선은 과거 유신시대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미래를 선택할 것이냐는 기로에 서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7월30일)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보고를 받으면서 “대통령은 정치적 존재니까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의문사위를 공격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의 이 같은 언급은 한나라당 박 대표의 정체성 공세에 대해 윤태영 청와대 제1부속실장을 통해 “대한민국 헌법에 담긴 사상이 내 사상이라 달리 대답할 것이 없다. 다만 이철 유인태씨 같은 사람이 항거해서 감옥살이할 때 (나는) 판사 한번 해 보려고 유신헌법으로 고시공부한 것이 부끄럽다면 부끄러운 고백이다”고 밝혔던 것과는 크나큰 차이를 갖는다.
청와대 출신 열린우리당 한 초선 의원은 “노 대통령은 윤 실장을 통해 입장을 밝힐 때만 해도 한나라당 박 대표의 문제제기를 ‘뜬금없는 일’ 정도로 여겨 직접 나설 필요를 못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일부 보수 언론들이 계속 ‘노무현 정권=좌파 정권’이라는 색깔론을 펴자 이 문제에 대한 확고한 전선을 그릴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 직접화법으로 대응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노 대통령은 의문사위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한나라당과 박 대표의 공세에 대한 단순 맞대응 차원을 넘어 시쳇말로 “싸움판을 키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민주화 기여’와 간첩죄로 복역했던 인사들의 조사관 채용 등 의문사위 활동과 둘러싼 보수층의 반발을 고려해 두 사안에 대해 ‘부정적 언급’을 할 것이란 당초 예상과 달리 노 대통령이 오히려 의문사위의 역할 강화를 강조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를 단편적으로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지난 역사에서 쟁점이 됐던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국가적 사업이 필요하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역사를 바로 씀으로써 경계와 교훈으로 삼는 것은 수천년 인류사의 확고한 가치로 자리잡은 것이다. 반민특위 해체 이후 잘못된 역사의 규명이 되지 않고 지금까지 지연되고 있는데 누군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지난 7월20일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여권 내에선 노 대통령이 박 대표의 ‘도발’로 시작된 정체성 논란에 강경일변도의 대응에 나선 까닭을 이번 기회에 ‘개혁 대 수구’의 전선을 확실히 그려내겠다는 의도로 보고 있다. 박 대표가 현 정권의 정체성을 문제삼고 나섰지만, 논란이 증폭될 수록 노 대통령보다는 오히려 한나라당과 박 대표의 정체성에 문제가 많음이 드러날 것이란 자신감도 담겨 있다.
열린우리당 한 핵심당직자는 “박 대표는 자신이 제기한 정체성 논란을 통해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 논란과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둘러싼 비난여론, 개혁과 극우를 수시로 넘나드는 오락가락 행보에 대한 비판 등으로 크게 손해를 입었다. 정체성 문제는 분명 박 대표에 ‘자충수’로 작용하고 있으며 쉽게 벗을 수 없는 부담이 될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 같은 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역공에 나선 것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정수장학회 문제와 과거사 청산에 대한 인식 등을 통해 자신이 ‘유신의 딸’로 구 정치 패러다임에 젖어있는 정치인이라는 한계를 보여줬다”(김현미 대변인), “미래형 지도자로 기대를 받아온 박 대표가 친일문제와 유신독재 등을 옹호하는 듯한 입장을 보인 것은 과거지향적 정치인이라는 점을 자인한 꼴”(임종석 대변인) 등의 언급엔 여권이 ‘박근혜 발’ 정체성 논란에 ‘불감청 고소원(감히 청하지는 못할 일이나 본래부터 바라던 바다)’의 느긋한 입장임이 배어 있다.
그러나 여권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이 정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정체성 논란의 전면에 나선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개혁당 출신의 열린우리당 한 초선 의원은 “녹음기 틀 듯이 반복된 공세로 대통령과 여당이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관료 출신 한 초선은 “여당이 대통령까지 나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으로 정쟁을 증폭시킨 데 대해 국민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러면 정체성 논란에 불을 당긴 박 대표의 손익 계산은 어떨까. 한나라당 안팎의 분위기는 대체로 “남는 장사는 분명 아니다”는 쪽으로 쏠려 있다.
우선 긍정적 평가는 박 대표 주변과 당직자 라인에서 주로 많다. 심재철 기획위원장은 “노무현 정권의 정체성에 대해 정식으로 문제제기한 것은 적절했다. 국민들이 불안해 하고 궁금해 하는 것을 박 대표가 대신해 짚은 것”이라고 했고, 박 대표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핵심 당직자도 “박 대표가 노 대통령의 근본에 문제제기를 하면서 단순한 야당 대표가 아니라 대통령과 맞설 수 있는 정치지도자란 인식을 강렬하게 심어줬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기류는 여권의 대대적인 역공에 당황해 하는 쪽이다. 원희룡 최고위원은 “일련의 국가정체성이 걸린 문제에 대해서 정부의 편향적이고 우려를 금할 수 없는 대응들이 계속되는데 대해 단호히 그 잣대를 짚고 나간 것은 적절했다”면서도 “반복되는 맞대응을 통해서 과거로 끌려가서도, ‘무한 상극’의 정치로 끌려가서도 안된다는 원칙을 잃었다”고 평가했다.
남경필 의원(원내수석부대표)도 박 대표가 제기한 정체성 논란이 ‘역풍’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남 의원은 “여당 공격에 의연히 대처했던 박 대표가 요즘 부친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의연함을 잃은 게 아닌가’는 생각이 든다. 박 대표가 그런 것들을 의연하게 풀어나가야 진정한 지도자로 설 수 있다. 정수장학회 문제도 어떤 방법으로든 짚을 건 짚고 (대선 전에) 털고 가야 한다. (오래 끄는 것이) 박 대표 자신에게도 유리하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나라당내 소장 개혁파의 양축인 두 사람의 이 같은 발언엔 정체성 논란이 결코 박 대표에 ‘호재’는 아니라는 인식이 담겨 있다.
박 대표의 ‘전투성 부족’을 비판해왔던 비주류와 중진들의 반응은 더욱 차갑다. 이들은 “박 대표가 제대로 준비도 않고 무작정 공세에 나섰다 역공을 당해 결과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영남권 한 중진은 “박 대표와 당이 구체적 내용 없이 추상적인 정체성 위기론만 반복하는 바람에 국민에게 ‘이념 공방’으로 비쳐지면서 여권의 숱한 실정이 가려지는 의외의 결과가 나타났다. 정체성 위기론을 꺼낸 것까지는 괜찮았을지 모르나 이를 받쳐줄 각론 준비를 너무 소홀히 했다. 공방의 주도권이 완전히 여권에 넘어간 것은 분명 문제다”고 말했다.
박 대표도 최근의 상황이 자신의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휴가중이던 7월말 자신의 미니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요즘 더위 만큼이나 저도 어렵고 힘든 나날을 이겨내고 있다”고 밝혔다. “누구나 살면서 어떤 어려움도 없이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꼭 딛고 일어서야만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분발을 다짐하기도 했지만, 이미 꼬이기 시작한 상황을 풀어나갈 해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 박 대표의 고민이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