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두기 가고, 조각남 모여!
▲ 영화 <비열한 거리>의 한 장면. | ||
‘수년간 운동경험이 있는 자, 키 175cm 이상, 잘생긴 외모 및 대졸 우대’
얼핏 보면 경호원 구인광고처럼 느껴지는 문구지만 실상은 최근 경찰에 검거된 조직폭력 ‘이태원파’의 조직원 선발 기준이다. 경찰에 따르면 ‘이태원파’는 새 조직원을 뽑는 과정에서 신체와 용모에 기준을 두고 2~4년에 걸쳐 조폭 생활과 관련해 다양한 교육을 수료하게 하는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도록 했다. 조직원 가운데는 서울 근교 4년제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태원파’는 2008년 1월 중순경 이태원 등지에서 유흥업소를 관리하며 패거리 형태로 폭력을 행사하던 2개파 조직의 70여 명이 연합해 생겨난 것으로 전해진다. 단체 결성식은 이태원동의 한 식당 3층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오 씨가 이끌던 40여 명과 서 아무개 씨(52)가 이끌던 30여 명이 모여 서열별로 식당 1층에서 3층까지 도열했다고 한다. 조직원들은 양 세력의 두목인 오 씨와 서 씨에게 허리를 90°로 굽혀 인사를 한 후 나이순으로 테이블 양쪽으로 앉았고, 서 씨가 “이제 우리는 한식구가 되었으니 잘해보자”고 외치자 오 씨가 “이태원 파이팅!”을 외치면서 건배를 제의하면서 ‘이태원파’가 공식 출범했다고 한다.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 ‘이태원파’의 영입대상이 된 후에도 정식 조직원으로 인정받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고 한다. 기업에서 인턴사원을 교육시키는 것처럼 조폭 교육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조폭 후보생들은 2~4년 정도의 수습기간 동안 숙소에서 단체 생활을 하며 ‘조폭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수사기관에 노출되는 걸 피하기 위해 이들은 한남동 등지의 헬스클럽을 옮겨 다니며 기초 체력을 다졌다.
이들은 영화 <공공의 적3>에서처럼 후보생들을 정식 조직원으로 키우기 위해 합숙을 하며 격투기 및 조직의 행동강령 등을 교육시켰다고 한다. 특히 숙소 내에서는 조직원들의 전투력 강화를 위해 후보생들끼리 편을 나누어 혹독한 싸움연습을 시키기도 했다는 게 경찰의 전언.
이들이 내부 기강을 잡기 위해 만든 행동강령도 눈길을 끈다. △선배들에게 90°로 인사하고 절대 복종한다 △조직을 이탈하면 손가락을 자른다 △휴대전화는 항상 켜 놓고 10분 내로 출동해야 한다 △동네에서 술 먹지 않는다 △다른 조직에게 기죽지 않는다 △위반 시는 단체 차원의 징벌(줄빳다)을 가한다는 것 등인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동네에서 술 먹지 않는다’라는 부분. 활동 지역에서 술을 마시다 일반인과 시비가 붙으면 품위가 손상된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이러한 행동강령은 패거리 형태로 조직 활동을 할 당시부터 철저하게 지켜져 왔다고 한다. 2006년 6월 중순 이태원동 한 호텔에서 행동대원 이 아무개 씨(26) 등 7명이 “조직을 탈퇴하겠다”고 하자 두목 오 씨가 “탈퇴하려면 손가락 하나를 바쳐라”며 실제로 단지를 명령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이 씨가 흰 천과 사시미칼을 이용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려고 했지만 오 씨가 이 씨를 설득하는 데 성공해 실제로 단지는 시행되지 않았다.
이들은 ‘이태원파’를 결성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세를 과시했다고 한다. 지난해 5월 초순경 장충동 소재 자유센터웨딩홀에서 있었던 조직원의 결혼식장에 두목 오 씨 등 20여 명이 참가하여 원로 조폭들에게 90°로 예의를 표시하는 등 여러 차례 타 조직원들 앞에서 집단으로 위력을 과시했던 것이다.
이들은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철거 현장에 관여해 돈을 뜯어낸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2008년 8월 22일 오후 4시경 부두목 김 씨 등이 서울 서초구 서초동 N 빌딩 철거 현장에서 보상에 불만을 품은 세입자로부터 연락을 받고 조직원 50여 명을 동원해 철거 현장 펜스를 뜯어내고 난입했다. 철거 작업을 하고 있던 인부 10여 명을 각목 등으로 폭행해 전치 3주의 상처를 입히고 공사를 중단시켰다. 이후 이들은 건물주로부터 합의금 명목으로 6억 원을 받아 그중 3억 원을 챙겼다.
한편 이태원파는 전국구 조직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일본의 폭력조직인 야쿠자를 본 딴 ‘전국 네트워크화’를 표방하고 실제로 행동에 옮겼다고 한다. 야쿠자 조직처럼 오 씨는 조직의 후계자를 미리 뽑고 함께 연 3~5회 전국을 일주하며 각 지방 대표 폭력조직 두목들과 친목을 도모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들로부터 향응과 경비를 지원받았다고 한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지방의 조폭 사이에서 ‘이태원파’가 칠성파와 신상사파 등 전국 유명 폭력조직의 원로들을 모시는 서울 지역 대표 폭력조직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경찰의 지속적인 조직폭력배 단속으로 자금 확보가 어렵게 되자 불법 사설도박장을 운영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도박장 단속 시 바지사장과 도박자들만 검거될 뿐 도박장 운영 실체까지 파악하기 힘들다는 점을 노린 것. 이와 관련해 경찰은 조직 와해를 목표로 계좌추적 등을 통해 조직운영 자금을 파악해 기소하기 전에 법원에 몰수 보전을 신청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과거 조폭 수사를 담당했던 검찰 관계자는 “서울과 같이 상권이 큰 지역에서는 ‘이태원파’와 같이 까다로운 조직원 선발 기준이 나올 수 있다”며 “지방에서는 지역이 협소하다보니 서로 인간적으로 연결돼 있어 선배가 끌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리고 “조폭도 과거와 달리 외형적으로는 기업의 형태를 가지는 경우가 늘고 있기 때문에 조직원들이 외모가 준수하면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지방 조직에서는 ‘합숙’이라는 개념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좁은 바닥이라 조직원들이 어렸을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내온 사이가 대부분이라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