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수청구권에 결국 발목 체면 구겼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 무산으로 다음 순서로 거론되던 건설부문 사업 개편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연합뉴스
이처럼 상당수 기관투자자들이 합병에 회의적인 상황에서도 삼성은 끝까지 합병을 밀어붙였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기관투자자들의 반대 의사가 뚜렷했는데도 계속 밀어붙이는 모습은 그동안 삼성의 스타일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라며 “주주들을 설득하고 완벽한 타이밍을 기다릴 정도로 여유를 가질 수 없는, 그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고 말했다.
피합병되는 처지였던 삼성엔지니어링 측의 다소 모호한 태도도 눈길을 끌었다. 시장 관계자는 “10월 마지막주 초에서 양사 모두 가까스로 합병안건이 통과된 후 삼성중공업은 2900억 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에 나서며 대규모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를 막기 위해 공개매수가 위로 주가를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보여줬다”며 “하지만 1조 원의 이익잉여금을 보유한 삼성엔지니어링은 주가 부양을 위한 구체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재용 부회장
삼성의 중공업 및 건설부문 계열사는 이재용 부회장과 이부진·이서현 사장, 삼남매간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는 1990년대 초 이건희 회장 방문 이후 오너 일가의 방문은 중단됐다. 그런데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 상무로 있던 지난 2007년 방문했다. 앞서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에 입사 후 가진 신규 선임 임원 워크숍 때에도 다른 승진자들과 함께 거제 조선소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다. 이는 ‘삼성중공업은 이재용 부회장 몫’이라는 평가로 이어졌다.
반면 삼성엔지니어링은 이서현 사장의 남편 김재열 사장이 2012년부터 경영기획총괄사장을 맡고 있다. 언젠가 세 남매간 계열분리가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이번 합병은 김 사장이 중공업부문에서 손을 떼는 계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삼성은 계열사별로 흩어져있던 스포츠단을 이서현 사장 몫으로 유력한 제일기획에 몰아줬다. 삼성엔지니어링을 중공업에 넘기는 대신 스포츠단을 맡기려 한다는 분석을 낳았다. 결국 이번 연말 인사에서 김 사장의 거취가 중요해졌다.
중공업부문 합병 무산으로 그 다음 순서로 거론되던 건설부문 사업 및 지배구조 개편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현재 그룹 건설부문의 중추인 삼성물산은 삼성전자가 지배하는 삼성SDI가 최대주주지만 이부진 호텔신라·제일모직 사장이 상사 고문을 맡으며 영향력을 갖고 있다. 삼성물산은 삼성전자의 2대주주며, 주요 계열사 지분을 다수 보유하고 있어 이 부회장 입장에서는 강력한 지배력을 구축해 둘 필요가 있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은 삼성물산을 적절하게 재편하는 사전 작업 성격도 짙었다. 그런데 단추가 제대로 채워지지 못했다.
한편 합병 시도가 무산되면서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은 각각 강력한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졌다. 삼성은 삼성캐피탈과 삼성카드 합병, 제일모직과 삼성SDI 합병 등 경영상의 주요 고비마다 합병을 통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며 구조조정 부담을 최소화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전략을 펼치기 어렵게 됐다. 재계 관계자는 “독자생존을 위해서건 합병 재추진을 위해서건 기업가치 제고가 절실한데, 업황이 부진하다 보니 결국 내핍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의 강력한 구조조정이 이 부회장의 평판에 긍정적일 리 없다”고 우려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