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섭 기자의 연예편지 두 번째
그런데 우리의 ‘공주’를 앗아간 폐암이라는 질병이 최근 한 CF를 통해 엄청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바로 보건복지부의 금연 광고 ‘호흡의 고통’ 편입니다. ‘들이마시고 내뱉는 흡연의 쾌감이, 들이마시고 내뱉는 호흡이 고통이 되었습니다’라는 카피가 매우 인상적이며 산소 호흡기에 의존해서도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는 CF 속 남성의 모습이 다소 충격적입니다.
우리의 ‘공주’도 저렇게 힘겹게 호흡의 고통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집니다. 물론 금연 CF는 흡연이 폐암 발병률을 높이니 금연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폐암의 고통을 최대한 자극적으로 보여줄 필요성이 충분한 CF입니다. 보건복지부는 뇌졸중을 다룬 ‘더 늦기 전에’ 편에 이어 공격적인 금연 CF를 이어가고 있죠.
금연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정당한 목적이 있는 공익 CF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큽니다. 이런 CF가 암과 뇌졸중 같은 치명적인 질병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을 왜곡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외국에선 암에 걸렸을지라도 일상생활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합니다. 의사에게 암에 걸렸다는 얘길 듣는 순간 “얼마나 살 수 있냐?”는 질문을 하는 것도 대한민국 국민들뿐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는 시한부 인생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의 학습 효과 때문이겠죠. 결국 대한민국에서 암 진단은 당사자에게 시한부 판정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암에 걸렸다는 얘길 듣는 순간 회사를 그만두는 등 일상생활을 모두 중단합니다.
그렇지만 암 전문가들은 오히려 이런 부분이 더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일상생활을 유지하며 담담하게 암과 싸워나가는 것이 더 좋다고 얘기하는 것이죠. 이처럼 유독 암에 대한 공포감이 심해 암 발병 이후 적절한 대처보다는 공포감이 더 건강을 악화시키는 경향이 짙은 우리네 국민정서에 자칫 금연광고 CF가 금연 유발 효과라는 장점보다 더 치명적인 단점을 드러내진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실제 우리의 ‘공주’ 고 김자옥 씨는 암 투병 중에도 연기에 대한 열정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7년가량 암 투병을 한 배우의 유작이 직접 무대에 서야 하는 악극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인의 연기 열정은 충분히 입증됩니다. 고인은 암이라는 치명적인 질병 앞에서 ‘얼마나 살 수 있냐’는 고민보다는 ‘얼마나 더 열정적으로 살 수 있나’를 고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암은 힘든 게 아니라 이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병이다”는 고인의 말이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인 암이라는 질병에 대한 국민 정서를 조금이나마 바꿔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폐암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호흡의 고통’에만 초점을 맞춘 보건복지부의 CF는 정말 많이 아쉽습니다. 보건복지부 입장에선 금연 캠페인도 중요하지만 암과 같은 치명적인 질병에 대한 국민 정서, 그리고 암에 대한 환자들의 적절한 대처 등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부분을 감안하면 더욱 아쉽습니다. 금연률 높이자고 암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심을 높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를 크게 보는 장사입니다.
보건복지부의 금연 CF에 등장한 산소 호흡기는 또 다른 생각을 유발합니다. 바로 올해 많은 사랑을 받은 영화 <안녕, 헤이즐>입니다. 이 영화는 산소통을 캐리어처럼 끌고 호흡기를 생명줄처럼 차고 있는 헤이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헤이즐(셰일린 우들리 분)은 열세 살 때 갑상선암에 걸린 뒤 암이 폐로 전이돼 24시간 호흡기를 차고 다니는 10대 여성이죠. 그는 한때 고교 농구 스타였으나 골육종에 걸려 한쪽 다리를 절단한 어거스터스(안셀 엘고트 분)를 암환자 모임에서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헤이즐은 어린 시절부터 오랜 암 투병으로 매우 우울한 여성인 데 반해 어거스터스는 암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했지만 밝고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려고 하는 남성입니다.
시한부 인생의 10대 남녀가 만났으니 눈물 없이는 못 볼 최루성 영화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 영화는 밝고 경쾌한 하이틴 멜로 영화를 추구합니다. 물론 암 투병이라는 슬픔의 한계는 분명하지만 이 영화는 그 한계를 뛰어 넘는 그 무엇인가를 보여주려 합니다. 공항에서 만난 한 어린 소녀가 산소 호흡기를 보고 신기해하자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직접 착용까지 할 수 있게 해주는 헤이즐의 여유가 이 영화가 암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암 환자라는 편견으로 그들을 바라보지 않는 일반인들의 시선, 그리고 암에 굴복하지 않고 일반인처럼 열심히 살려고 애쓰는 헤이즐과 어거스터스의 모습을 보면 암이라는 질병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달라집니다.
보건복지부의 금연 CF와 영화 <안녕, 헤이즐>에는 모두 산소호흡기가 등장하지만 그 활용방법은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아마 산소호흡기라는 물건이 아닌 폐암이라는 질병에 대한 시선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죠.
물론 흡연은 건강을 위해 당연히 중단돼야 합니다. 그렇지만 금연에 대한 메시지 역시 무시무시한 금연 CF보다는 영화 <안녕, 헤이즐>이 훨씬 강력합니다. 영화에서 어거스터스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폐암 환자인 헤이즐은 어거스터스의 흡연에 강하게 반발하죠. 그렇지만 어거스터스는 계속 입에 담배를 물고 있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것은 사람을 죽이는 물건을 입에 물지만, 날 죽일 힘은 주지 않는 상징적인 행동이야.“
여기서 말하는 ‘사람을 죽일 힘’이란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어거스터스는 담배를 입에 물고만 있을 뿐 불을 붙이진 않습니다. 다시 말해 담배를 입에 물고 있지만 담배를 피우진 않는다는 얘기죠. 이 장면을 보며 많은 흡연자들은 자신이 사람을 죽이는 물건(담배)에 굴복해 날 죽일 힘(흡연 행위)을 주고 있다는 부분에서 많은 자괴감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금연 캠페인으로는 이런 방식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