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해찬 총리가 지난 총선 때 정계은퇴를 고려했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져 화제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대외적으로 비쳐지는 이 총리는 여권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50대 초반의 나이에 국회의원 5선과 전무후무한 여당 정책위원장 3회와 최고위원, 교육부 장관 등을 지낸데 이어 내각의 ‘수장’, 그것도 역대 최고의 ‘실세 총리’가 된 캐리어가 이를 입증한다.
그러나 이 총리도 정치역정을 한꺼풀 벗겨 보면 위기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 주변의 평가다. 여권내 지인들은 지난 4·15 총선이 이 총리의 정치적 진운의 최대 고비였다 말한다. 88년 13대 총선에서 처음 금배지를 단 이후 4선까지 순항해 온 이 총리가 17대 총선을 앞두고는 한때 불출마까지 심각하게 고려할 만큼 어려운 처지를 겪었기 때문이다.
이 총리의 지역구인 서울 관악 을은 수도권 내에서 호남권 유권자들의 영향력이 가장 센 곳. 97년, 2002년 대선에서 당시 김대중(DJ)-노무현 후보의 득표율이 수도권을 통틀어 1위를 차지할 정도였으며, DJ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이 총리가 이 지역에서 롱런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2003년 9월 이 총리가 신당 창당을 위해 민주당을 탈당하면서 사정은 180도 달라졌다. 호남권 유권자들이 이 총리에 급격히 등을 돌리면서 급격히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9월18일에는 이재진 부위원장 등 지구당 핵심 당직자들과 문규진 전 관악구 의회 의장 등 상당수 당원들이 이 총리의 탈당을 규탄하며 유종필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후보로 옹립해 이 총리측을 곤혹스럽게 만들 정도였다.
민주당 탈당 이후 이 총리는 핵심 지지층이 와해되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반면 민주당 조직을 장악한 유 전 비서관은 중앙당 대변인을 맡으면서 지명도와 지역기반을 급속히 확충해 나갔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유 전 비서관이 이 총리를 앞서 나갔고, ‘3·12 탄핵사태’ 이전까지 이같은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
이 무렵 이 총리는 가까운 인사들에게 지역구 사정을 토로하며 “차라리 선거에 나서지 않고 정치 외에 다른 일을 찾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당 한 당직자는 “2월 하순까지만 해도 이 총리가 선거 승리에 대해 별로 자신이 없어 한 것은 사실”이라며 “불출마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얘기를 측근들로 부터 들은 적 있다”고 말했다. 이 총리도 총선 직후 이 부분과 관련, “삶을 되돌아 보니 문득 데모 20년, 국회의원 20년을 빼곤 해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무한 느낌을 받았고 따라서 좀더 여유있게 살자는 생각을 했다”는 말로 불출마 검토설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우리당 원내대표 경선(5월11일)도 이 총리에겐 쇠락의 고비가 될 뻔 했다. 서울대 동기(72학번)이긴 하지만 정치적으론 한참 후배인 천정배 의원(3선)에 졌기 때문이다. 2002년 4월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낙선하는 등 선출직 선거에 유독 약한 면모를 보여온 이 총리를 두고 당내에선 “더 이상 당 지도부에 진입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평가가 많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총리에게 이때의 패배는 ‘화려한 비상’의 발판이 됐다. 이 총리가 낙선의 후유증을 겨우 수습해 가던 6월8일 노 대통령이 그를 총리에 지명해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억세게 관운 좋은 사나이’라는 이 총리에 대한 시샘어린 평가도 물론 계속 유효하게 됐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