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신일 안심하긴 아직 이르다
▲ (왼쪽)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오른쪽)천신일 세중나모여행사 회장 | ||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한 법리 전쟁 과정에서 숨겨진 핵뇌관이 폭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박연차 게이트’ 재판 과정에서 검찰의 최종 수사 결과에 포함되지 않았던 현역 의원들의 실명이 공개되는가 하면 이명박 대통령의 친구이자 여권 실세로 통하는 천신일 세중나모여행사 회장에게 불리한 증언이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관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여기에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떠나보낸 뒤 절치부심하며 정국 주도권 장악을 노리고 있는 민주당 등 야권은 이번 정기국회 때 박연차·천신일 특검 카드를 다시 꺼내들어 대여 공세에 총력전을 펼친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치열한 법리 공방전이 재연되면서 정치권을 또다시 초긴장 모드로 몰아넣고 있는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한 숨은 핵뇌관은 과연 폭발할 수 있을까.
연차 게이트’ 사건을 수사해 온 검찰은 6월 12일 박 전 회장을 포함해 정·관계 인사 21명을 기소하는 선에서 사실상 수사를 종결했다. 정치권 인사 중에는 박관용·김원기 전 국회의장, 한나라당 박진·김정권 의원, 민주당 서갑원·최철국 의원 등이 기소 대상자에 포함됐다. ‘박연차 리스트’에 오르내렸던 김태호 경남도지사를 비롯해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 이종찬 전 청와대 민정수석,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 등은 무혐의 처분됐다.
노 전 대통령 서거로 핵심 의혹 규명에 실패한 검찰이 부실·봐주기 수사 논란만 증폭시킨 채 ‘박연차 게이트’를 법원으로 넘긴 꼴이 됐다. 정치권의 시선이 서초동 법원으로 향하고 있는 것도 미완의 검찰 수사와 맞물려 있다. 검찰에서 밝혀내지 못한 숨은 뇌관이 당사자들의 치열한 법정 공방전 과정에서 폭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8월 3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서갑원 민주
당 의원에 대한 공판에서 서 의원 측 김 아무개 변호사는 박 전 회장이 정치자금을 전달한 것으로 소문난 현역의원 6명의 실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해 잔잔한 파문을 던진 바 있다. 김 변호사가 언급한 인사는 한나라당 소속 H, A, K 의원과 민주당 소속 W, K, L 의원 등 모두 6명이다.
김 변호인사는 이날 증인으로 나선 박 전 회장을 상대로 “한나라당 H 의원에게 2000만 원을 전달한 것이 맞느냐”고 추궁했고, 박 전 회장은 이를 시인했다. 변호인이 ‘H 의원이 정승영 정산개발 사장을 통해 고맙다는 말을 전달해온 것이 사실이냐’고 묻자 박 전 회장은 “예”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 전 회장은 김 변호사가 다른 의원들의 실명을 언급하면서 돈 전달 유무를 묻자 “답변하기 곤란하다” “진술을 거부하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박 전 회장이 실명으로 언급된 의원들에게 실제로 돈을 전달하지 않았다면 김 변호사의 질문을 강하게 부인했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박 전 대표가 강하게 부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김 변호사의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는 형국이다.
검찰은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한 재판 과정에서 박 전 회장에게서 금품을 받고도 처벌받지 않은 정치인이나 유력 인사들이 더 있다는 증언이 속속 제기되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검찰은 기소하지 않은 정치인들은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부실·봐주기 수사 의혹과 함께 형평성 논란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천신일 회장에 대한 공판에서는 ‘박연차 구명 로비’와 관련한 실체가 조금씩 그 베일을 벗고 있어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해 박 전 회장이 구속된 이후 천 회장이 태광실업 관계자들에게 박 전 회장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진술이 법정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는 천 회장의 주장과는 달리 그가 세무조사 무마 로비 외에도 박 전 회장의 구명 로비에도 깊숙이 개입했을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 유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8월 25일 천 회장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태광실업 임원 최 아무개 씨는 “박 전 회장 구속 이후 천 회장이 ‘빠른 시일 내 풀려나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증언했다. 최 씨는 또 “천 회장이 지난해 8월 국세청 세무조사 당시 ‘한상률 국세청장을 잘 알고 있는데 여러 차례 잘 봐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
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천 회장은 세무조사 무마 로비 대가로 중국 돈 15만 위안(한화 2500만 원 상당)을 받고, 6억여 원의 채무 변제를 요구한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상태다.
민주당 등 야권이 천 회장을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한 여권 비리 몸통으로 지목하면서 검찰에 성역없는 수사를 촉구했지만 검찰은 끝내 천 회장을 불구속 기소하는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했다. 또한 검찰은 천 회장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난 대선자금 의혹 사건에 대해서도 수사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천 회장은 2007년 자사 주식을 매각해 330억 원을 마련했고, 이 대통령의 특별당비 30억 원을 대납했다는 의혹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도 검찰은 대선자금 의혹 사건은 ‘박연차 게이트’의 본질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예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민주당이 박연차·천신일 특검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검찰을 압박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민주당은 지난 4월 ‘박연차 세무조사 무마 청탁사건 특검법’을 국회에 제출한 데 이어 6월 5일에는 이 대통령과 천 회장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바 있다. 민주당은 또 검찰의 ‘박연차 게이트’ 사건에 대한 최종 수사 발표를 접한 뒤 “박연차·천신일 특검 도입의 절대적 필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바로미터”라며 검찰 수사 발표를 비판하면서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권은 박연차 특검 도입과 국정조사를 즉각 수용해 검찰 수사의 정당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 특히 정세균 대표는 “천신일·MB(이명박 대통령) 대선자금이라는 본질은 놔두고 노 전 대통령과 야당 의원에게 정치보복을 했다는 사실을 특검을 통해 명명백백히 밝혀야 한다”고 분개하기도 했다.
이처럼 민주당이 ‘박연차 게이트’를 둘러싼 각종 의혹과 미스터리를 특검을 통해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자 했지만 예상밖의 대형 이슈가 잇따라 터지면서 박연차 사건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미디어법 전쟁에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면서 특검 카드가 조용히 묻히고 말았던 것.
하지만 민주당은 조문정국이 지나고 정기국회가 개원한 만큼 다른 야당과의 공조를 통해 박연차·천신일 특검을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박연차 게이트’ 사건과 관련한 각종 재판 과정에서 새로운 증언이 속속 제기되고 있고, 검찰이 기소하지 않은 현역 의원들의 실명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만큼 특검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검찰의 수사 종결로 잊혀져 가던 ‘박연차 게이트’ 사건이 재판 과정에서 불거진 새로운 증언과 현역 의원들의 실명 공개로 또다시 정치권을 긴장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민주당 등 야권은 정기국회 주도권 장악 전략과 맞물려 특검 카드를 꺼내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박연차 게이트’ 사건이 가을정국을 달구는 화약고로 부상할 조짐이 일면서 여의도 정가에 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