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선 자상한 아빠, 밖에선 굶주린 늑대
이 남성은 경기도 북부 일대를 중심으로 성폭행을 벌여온 일명 ‘경기도 발바리’였다. 자매를 함께 성폭행하고 남자친구 앞에서 여성을 능욕하는 끔찍한 범행을 벌이는가 하면 피해 여성을 두 세 차례에 걸쳐 다시 찾아가 성폭행하는 인면수심의 행각을 일삼았다.
하지만 지난 4일 검거된 범인의 모습은 잔혹한 강간범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부인과 일곱 살 난 딸을 둔 평범한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이웃주민들은 이 남성을 “딸자식 사랑이 지극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10년 동안 치밀한 수법을 동원해 온갖 욕정을 채워온 ‘경기도 발바리 사건’을 추적해봤다.
‘발바리’ 차 아무개 씨(38)의 범행은 10여 년 전인 1999년도 초부터 시작됐다. 경찰에 따르면 차 씨는 이때부터 1톤 트럭으로 소포를 배달하는 일을 했다. 차 씨가 배달을 맡은 곳은 파주, 양주, 의정부, 고양시 등 경기북부 지역이었다. 이것이 차 씨가 경기북부 일대를 휩쓸며 범행을 벌인 배경이 됐다.
차 씨의 첫 범행 목적은 단순히 금품이었다. 밤 늦게 배달을 마친 차 씨는 사람이 없는 원룸이나 단칸방 등에 침입해 귀금속과 현금 등을 훔쳤다. 배관을 타고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저층 빌라가 주 대상이었으며 범행은 주로 자정부터 오전 4시 사이에 벌였다.
어느 날 차 씨가 사람이 없는 줄 알고 한 원룸에 들어갔다가 잠들어 있던 집주인 A 씨에게 발각됐다. 차 씨는 신고를 막기 위해 A 씨를 성폭행했다. 이것이 10여 년간 경기 북부지방을 공포에 몰아넣은 차 씨의 연쇄 성폭행 사건의 시발점이다.
이후 차 씨의 관심은 금품보다 성폭행으로 쏠렸다. 일하는 시간에 여성이 혼자 사는 집 중에서 침입이 용이한 곳을 찾은 뒤 새벽 시간에 범행을 저질렀다. 차를 몰고 지나가면서 범행대상을 발견하면 곧바로 쫓아가 범행을 벌이기도 했다. 심지어 맘에 드는 여성일 경우엔 집요하게 며칠씩 쫓아다니며 기회를 노리다 끝내 욕정을 채우기도 했다.
범행이 장기화되면서 차 씨의 수법은 더욱 파렴치해졌다. 지난 2005년경에는 친자매를 성폭행했다. 파주에 위치한 한 원룸에 침입한 차 씨는 안방에 잠들어있던 언니 B 씨를 성폭행하고 결박한 후 곧이어 건넌방에 있던 동생을 성폭행했다.
범행대상이 남성과 함께 자고 있을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차 씨는 남성을 결박하고 그 앞에서 여성을 성폭행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차 씨는 한 여성을 두세 번씩 찾아가 성폭행하기도 했다. 차 씨는 경찰조사 과정에서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기억해뒀다가 몇 달 뒤 다시 찾아가기도 했다”고 진술해 경찰조차 경악케 만들었다.
10여 년간 이어진 범행에도 그가 검거되지 않은 것은 치밀한 범죄 수법 때문이었다. 차 씨는 항상 마스크와 모자, 장갑을 착용하고 범행을 벌여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범행 후에는 집안에 있던 청소기를 이용해 현장을 청소하고 먼지주머니를 빼가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심지어 물 청소까지 해 족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피해여성을 화장실로 끌고가 그곳에서 범행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는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가 편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또 항시 콘돔을 이용해 현장에는 그의 정액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범행 현장에서 가지고 나온 증거품들은 모두 소각하거나 땅에 파묻었다.
범행 현장에서 가지고 나온 귀금속들은 차속에 숨겨놨다가 서울과 경기도 일대를 오가며 금은방에 팔아 넘겼다. 훔친 물건 중 일부는 부인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또 추적당할 것을 우려해 피해자의 집에서 현금과 귀금속 외에 신용카드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 치밀함도 보였다.
경찰에 따르면 차 씨의 범행으로 신고 된 피해액은 4000만 원이 넘는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은 신고를 하지 않은 사람이 상당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 수사과정에서 피해액수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차 씨의 치밀함에 7년여간이나 함께 살아온 부인도 감쪽같이 속았다고 한다. 경찰은 “차 씨가 거의 아침에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왔기 때문에 집에서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듯하다”고 설명했다.
경찰에 따르면 차 씨는 2002년 부인 C 씨와 결혼식
을 올렸다. 둘 사이에는 일곱 살 난 딸이 있었다.
또 차 씨는 형편이 어려운 형을 대신해 열한 살 난 조카까지 키우고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이웃들도 차 씨를 ‘자상한 아빠’ ‘효심 많은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고 경찰은 전했다.
차 씨는 월 200만 원 정도의 월급에 경기도 북부 지역에 자신 소유의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등 경제적인 어려움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차 씨의 꼬리가 잡힌 것은 지난 7월 30일. 동두천의 한 주택에서 피해자를 성폭행하고 금품과 휴대폰을 챙겨 달아난 차 씨가 피해자의 휴대폰으로 유료 음란전화를 사용하면서다.
2007년부터 동일범에 의한 연쇄 성폭행 사건으로 보고 전담팀을 구성해 수사를 벌여왔던 경찰은 마지막 범행현장에서 휴대폰을 가지고 나갔다는 점에 주목했다. 통화기록 조회결과 40여 분간 유료 음란전화를 이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함께 통화를 했던 여성을 찾은 경찰은 차 씨가 음란전화로 알게 된 여성과 지난달 몇 차례에 걸쳐 성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후 경찰은 이 여성을 통해 차 씨를 추적했고 결국 9월 4일 검거에 성공했다. 당일 차 씨는 자신의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기 위해 집을 나서는 중이었다. 수사 시작 2년 만에 올린 개가였다.
경찰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차 씨의 범죄는 실로 놀라웠다. 차 씨는 지금까지 신고된 성폭행 범행 중 동일범 소행으로 추정돼 온 125건 모두 자신의 소행임을 시인하고 이를 포함해 모두 200여 차례에 걸쳐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이에 경찰에서는 차 씨의 여죄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한편 차 씨는 전과 5범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는 절도와 도로교통법 등과 관련된 것으로 “성범죄와 관련돼 검거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경찰은 밝혔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