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 부른 논란에 ‘’기름‘’만 부었다
▲ ‘미디어법’과 관련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이뤄진 지난 10월 29일, 천정배 전 장관을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헌재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민주당은 장세환 의원이 ‘의원직 사퇴’ 카드를 꺼내드는 등 이명박 정권에 대한 총력 투쟁모드로 돌입한 상태다. 야권 일각에서는 헌재가 미디어법 논란의 공을 다시 정치권에 떠넘긴 만큼 국회 차원에서 미디어법 재개정을 추진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언론단체를 비롯한 법조계와 학계, 시민사회단체 등도 헌재 결정에 대한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어 사회 분열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분위기다. 이른바 헌재발 ‘미디어 전쟁’이 여의도 정가를 넘어 사회 전반으로 확전되고 있는 상황이다. 헌재의 결정 이후 또 다른 뇌관을 장착한 시한폭탄으로 진화하고 있는 ‘미디어 전쟁’ 속으로 들어가 봤다.
“절차적 위법성을 인정하고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다.” 10월 29일 미디어법 권한쟁의 심판청구 사건을 기각한 헌재의 결정 소식을 접한 노영민 민주당 대변인이 던진 일성이다.
헌재는 이날 미디어법 처리 과정에서의 대리투표 및 일사부재의 원칙 위배는 인정하면서도 법안 자체에 대해선 사실상 효력을 인정하는 애매한 결정을 내려 ‘정치 재판’ 논란에 휩싸였다. 헌재가 한나라당의 법안 강행 처리 과정에서 야당 의원들이 표결권과 심의권을 침해당했다고 인정하면서도 법은 유효하다고 판단한 것은 결국 ‘정권 눈치 보기’ 아니냐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헌재가 야당의 청구를 받아들여 미디어법을 무효로 결정했을 경우 미디어법 강행처리를 밀어붙였던 정부와 여당은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헌재가 ‘정치적 결정’을 내렸을 것이란 게 야권과 법조계 일각의 시각이다.
그동안 당의 사활을 걸고 미디어법 무효화 투쟁에 나섰던 민주당은 헌재 결정을 접한 뒤 충격감과 당혹스러움 속에 비공개 최고위원회의와 의원총회 등을 잇따라 열어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움직임을 보였다. 민주당은 권한쟁의 심판청구는 기각됐지만 헌재가 미디어법 처리 과정의 위법성을 인정한 만큼 이를 지렛대로 미디어법 폐지와 재개정을 추진하는 한편 원내외 병행투쟁을 전개하는 초강경 대응으로 맞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헌재 결정 직후 열린 의원총회에서 정세균 대표는 97년 ‘노동법 날치기’에 대한 헌재의 유효 판결을 언급하면서 “이번에도 우리가 그대로 넘어가면 다수세력의 불법행위가 묵인되는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며 강경 투쟁을 독려했고, 박주선 최고위원은 “오늘은 헌재가 입법 쿠데타 허용을 선언한 날로, 헌재 명칭을 정치재판소로 개명해야 한다”며 성토했다.
민주당은 이날 결의문을 채택하고 “헌재 결정은 대한민국 헌정사의 오점으로, 언론악법이 그대로 실행되도록 묵인할 수는 없다. 시민사회단체 등과 적극 연대해 언론악법 폐지 및 개정에 들어가는 등 이명박 정권에 대한 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특히 국회 문광위원인 장세환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헌재의 잘못된 결정에 항의하고 다시는 이 땅에 사법권력의 반민주적, 반역사적 결정이 내려지는 일이 없도록 경종을 울리는 뜻에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자 한다”며 ‘의원직 사퇴’ 카드를 꺼내들기도 했다.
창조한국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다른 야당들도 헌재의 결정을 ‘정치 재판’으로 폄하하면서 대정부 투쟁에 동참할 뜻을 피력했다.
반면 한나라당은 “미디어법 통과에 대한 위헌시비의 근거가 종결됐다”며 헌재의 결정에 대해 환영의 뜻을 표했다. 조해진 한나라당 대변인은 29일 논평을 통해 “헌재가 미디어법 가결을 유효하다고 밝힌 것은 의회의 자율성을 존중해온 사법부의 전통적 입장을 견지한 것으로 본다”며 “이번 결정으로 미디어법 통과에 대한 위헌시비의 근거가 종결된 만큼 야당은 더 이상 정략적 공세를 그만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와대는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은 채 극히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김은혜 청와대 대변인은 29일 정례브리핑에서 “국회의 의사절차와 관련한 사안이므로 청와대에서 따로 언급할 사안이 아닌 것 같다”면서도 “헌재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전국언론노조 등 미디어법 원천 무효를 주창하고 있는 언론단체들은 헌재의 결정을 고도의 ‘정치 재판’으로 치부하면서 강경 투쟁을 선언하고 있는 반면 그동안 미디어법을 지원했던 방송개혁시민연대 등 일부 방송관련 단체는 헌재의 결정이 내려진 만큼 통과된 법을 추진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학계에서는 찬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헌재 결정에 대한 찬성론자들은 “헌재가 법 자체가 아닌 입법 절차에 문제를 삼은 만큼 법을 재개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반면 반대론자들은 “절차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사회적 합의가 실패한 법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 미디어법은 재개정 수순을 밟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헌법학자들도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일부 헌법학자는 “헌법상 권한이 침해됐는데 법률이 무효가 아니라면 국회의 의결 절차는 앞으로 장식조항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또다른 학자들은 “국회에서 의결정족수가 넘는 의원의 찬성으로 법안이 가결됐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고, 그 적법성 또한 부인해서는 곤란하다”며 헌재의 결정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처럼 헌재 결정을 놓고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일부 헌법재판관이 “헌재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소수 의견을 내 논란을 증폭시키고 있다.
조대현·송두환 재판관은 다수 재판관들의 결정에 대해 “가결 선포 행위의 심의·표결 권한 침해를 확인하면서 그 위헌성·위법성을 시정하는 문제를 국회의 자율에 맡기는 것은 모든 국가작용이 헌법 질서에 맞추어 행사되도록 통제해야 하는 헌재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신문법에 한해서 무효 확인 청구를 인용하는 소수 의견을 낸 김희옥 재판관도 “신문법안의 가결을 선포한 피청구인의 행위가 헌법과 국회법에 위배되는 것으로 인정한 이상 무효 확인 청구를 인용하는 것이 상당하다”고 주장해 논란을 부추기고 있다.
헌재 결정에 대한 반발 기류가 확산되면서 헌재의 결정문을 비꼬는 패러디도 속출하고 있다. 야당 대변인들은 논평을 통해 ‘성공한 쿠데타론’ ‘유권무죄론’ 등 모순된 논리를 예로 들며 헌재의 결정을 신랄하게 성토하고 있다.
민주당 노영민 대변인은 “정의는 야당에 있으나 권력은 여당에 있다는 정치적 판결”이라며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성공한 쿠데타도 결국은 처벌을 받았듯이 국민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같은 당 천정배 의원도 “자식의 아버지는 맞는데 아버지의 자식은 아니라는 건가”라고 반문하면서 헌재의 애매한 결정을 비꼬았다.
민주노동당 우위영 대변인은 “절도는 범죄지만 절도한 물건의 소유권은 절도범에게 있다는 식의 판결”이라고 비판했고, 진보신당 김종철 대변인은 “술은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판결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성토했다.
노회찬 전 의원은 “위조지폐임은 분명한데 화폐가치를 판단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커닝이나 대리시험은 확실한데 합격은 무효화할 수 없다는 결정”이라고 규정했다.
헌재 결정문을 빗댄 냉소적인 패러디는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헌재의 애매한 결정이 미디어법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역할을 한 게 아니라 정국을 급랭시키는 동시에 사회적 분열을 증폭시키는 또다른 뇌관으로 진화하고 있는 형국이다.
연말 정국 최대 핵뇌관으로 부상하고 있는 헌재발 ‘미디어 전쟁’ 뇌관이 언제 어떤 식으로 폭발할지 국민적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