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체류‘’ 뒤에서 척척 어시스트?
한 전 청장은 검찰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본격화되기 전인 지난 3월 15일 돌연 미국 뉴욕으로 출국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 주변에선 ‘사실상 도피 아니냐’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한 전 청장은 출국 후 지금까지 언론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은둔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일요신문>은 ‘한 전 청장이 오랜 미국 생활에 지쳤고 최근 측근들에게 귀국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는 보도를 한 바 있다. 이 보도를 제외하고는 한 전 청장의 미국 내 행적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최근 한 전 청장의 미국 비자가 만료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비자 갱신 과정 등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또한 <일요신문> 취재 결과 한 전 청장 재임 당시 비서실장으로 근무했던 A 서기관이 한 전 청장이 뉴욕으로 출국한 비슷한 시기에 미국 뉴욕 주미 대사관에 파견됐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한상률 전 청장은 지난 3월 16일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는 주변에 ‘3~5년간 뉴욕 주립대 공공행정학과에 방문 연구원 자격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 간다’고 말하고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한 전 청장이 태광실업 세무조사 무마 로비 및 표적 조사 논란을 피하기 위해 도피성 출국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해 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사 도중 자살하자 그는 모든 의혹을 풀 수 있는 핵심 ‘키 맨’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야권이 끊임없이 한 전 청장의 귀국을 종용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 10월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한 전 청장의 증인 채택 여부를 두고 여야정치권이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야당은 태광실업에 대한 국세청의 심층 세무조사와 관련해 모든 배경과 과정을 상세히 알고 있는 한 전 청장의 증인 채택에 ‘심혈’을 기울였다.
반면 한나라당은 한 전 청장이 증인으로 채택되는 것만으로도 야당에 공격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고, 채택된다 해도 미국에 머물고 있는 그가 출석할 리 없다며 이를 강하게 거부했다. 여야간 설전 끝에 한 전 청장은 민주당의 주장대로 증인으로 채택되긴 했으나 예상대로 국감장에는 출석하지 않았다.
특히 한 전 청장의 증인 채택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한 전 청장의 비자만료 기간을 놓고 논란이 일었다.
백재현 민주당 의원은 국회 상임위에서 “한 전 청장의 미국 비자는 지난 9월 15일 만료됐으나 정확히 어떤 루트를 통해서 비자를 갱신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백 의원은 국세청 측에 어떻게 한 전 청장이 귀국하지도 않고 비자를 갱신할 수 있었는지 여부를 물었으나 국세청은 ‘모르겠다’고 답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요신문>이 외교부 및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미국 비자 기간이 만료되면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단 미국 밖으로 출국한 뒤 자국이나 제3국에서 갱신하고 다시 입국해야 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국에 들어와 주한미국대사관을 방문해 비자를 갱신하는데, 일부는 캐나다 주재 미국대사관 등에서 비자를 갱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인의 사회적, 경제적 기반에 대한 증명이 불리하기 때문에 미국비자 발급 가능성은 희박하다. 간혹 이에 대한 증명 없이 발급을 해주는 영사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캐나다의 시민권이나 영주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국에서 신청을 하라며 비자 발급을 거부한다.
취재 결과 한 전 청장은 현지 대사관을 통해 비자를 갱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는 “현지 대사관을 통해서 갱신하는 경우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비자발급 대행 사무실의 한 관계자는 “현지에서 비자를 갱신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지만 주미한국대사관을 통해서 비자를 갱신했다면 이는 아주 특수한 경우에 속하고, 이런 경우는 정부 차원의 협조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세청은 사실 자체가 왜곡됐다며 반박했다. 한 국세청의 관계자는 “한 전 청장은 관광비자가 아닌 유학비자로 갔기 때문에 9월에 비자가 만료됐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국정원 측에서도 확인했다”고 말했다.
한 전 청장의 해외 체류와 관련해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한 전 청장 재임시절 비서실장이었던 A 서기관이 한 전 청장이 낙마하고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에 주미한국대사관으로 파견됐다는 사실이다.
A 씨는 지난 2006년 이주성 전 국세청장 재임시절 청장 비서실로 발령난 후 이주성 전 청장, 전군표 전 청장, 한상률 전 청장 등 3명의 청장을 보좌한 바 있다. 이주성 전 청장 인맥으로 분류됐던 A 씨는 탁월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오랫동안 비서실에서 근무했고, 국세청에서 3명의 청장을 보좌한 비서실 간부는 그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직 청장이 비리 사건에 연루돼 법정에 서면 청장 측 증인으로 나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충성심도 검증받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A 씨는 한 전 청장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난 연말에는 한 전 청장으로부터 직접 포상을 받았고 한 전 청장은 여러 직원들이 모인 송년회에서 A 씨를 특별히 칭찬하기도 했다고 한다.
A 씨는 이 전 청장과 전 전 청장 등이 각종 구설수 및 비리 사건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도 꿋꿋이 비서실을 지킨 것으로 알려졌다.
우연의 일치일까. A 씨는 한 전 청장이 물러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파견됐고, 그가 미국으로 떠난 후 곧바로 한 전 청장도 유학을 이유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A 씨의 공식적인 직함은 워싱턴 주미대사관 소속 세무협력관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국세청 내부에서는 A 씨의 갑작스런 해외 발령 및 역할에 대해서 반신반의하고 있는 분위기다. 또한 국세청 일각에서는 A 씨가 한 전 청장의 미국 내 ‘핫라인’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란 얘기도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국내에 들어오지 않고도 비자를 갱신한 점, 전직 비서실장이 한 전 청장의 비자갱신 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얘기가 돌고 있는 주미대사관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 등 석연찮은 정황들에 미뤄 A 씨의 역할에 의혹의 시선이 쏠리고 있는 형국이다.
이에 대해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능력 있는 국세청 고위직 인사를 전직 청장을 위해 미국까지 파견 보냈다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라고 반박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