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협력자 수록” vs “항일 지원도 했다”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재계의 뿌리는 두산그룹 창업주 박승직(1864~1950)이다. 한인 상계의 리더로 활약하여 ‘배오개의 거상’으로 불리던 박승직은 1924년 4월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융화를 표방하던 친일단체 동민회 평의원에 선임됐다. 박승직은 1938년 <매일신보>가 마련한 좌담회에서 조선통치에 있어 조선총독부의 시정이 적절하므로 개선이 전혀 필요 없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 외 조선총독부가 조선통치를 위해 만들어낸 각종 기구의 이사를 역임했고 거액의 국방헌금을 해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이 박승직의 아들이다. 박두병 회장의 뒤를 이어 장남 박용곤 명예회장을 필두로 한 3대가 현 두산그룹을 이끌고 있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박승직 창업주는 일제 치하에서 상업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한국 상인의 권익 옹호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분”이라며 “일제가 만든 각종 단체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만으로 친일파로 단정 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민족문제연구소에 박승직 창업주의 한국 상인들의 권익보호와 애국보호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한 바 있지만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것 같다”고 보탰다.
<친일인명사전> 끝부분에선 현기봉(1855~1924)이라는 인물을 만날 수 있다. 전남 영암 출신인 현기봉은 합방 후 목포부 참사를 지냈고 말년에는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로 활동했다. 사후 유언을 통해 목포·영암지역 학교 등에 거액을 기부했다. 현기봉의 아들로 호남은행을 설립한 현준호(1889~1950) 또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현준호는 1930년 3월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재임했다.
현준호는 1938년 사회교화공적자로 선정되어 조선총독 표창을 받기도 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 ‘현씨 집안’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현준호의 셋째아들이 현영원 전 현대상선 회장이며 현 전 회장의 둘째딸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현준호 유산 국가귀속과 관련해 현준호의 후손은 “할아버지는 친일파가 아니라 항일지사”라고 주장한 바 있다.
현준호가 호남은행을 설립하면서 측근으로 삼은 김신석(1896~1948)도 1939년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어 해방 때까지 재임해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그는 조선유림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된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특히 1943년 8월 징병제가 실시되는 ‘감격’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한 사업을 계획하는 모임에 참석한 바 있으며, 책 <신민의 길>을 배포하며 국민정신총동원과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조선의 부형들에게 어린 딸을 여자 정신대로 “안심하고 보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신석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의 사위가 삼성가와 사돈을 맺은 홍진기(1917~1986)이기 때문이다. 홍진기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는데 가장 큰 이유는 1940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뒤 1942년 경성지법 사법관 시보를 시작으로 판사생활을 했다는 것. “일제강점기 때 판사직을 맡은 것만으로 친일파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홍진기 후손의 주장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 때 사법 관리로 임명받기 위해 노력한 행위 자체가 문제된다고 보며, 사전에 수록하는 인물은 기본적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 협력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밝혔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홍진기의 아들이다.
삼양사 창업주인 김연수(1896~1979) 역시 중추원 참의를 지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1941년 중추원 참의에 임명된 후 해방 때까지 매년 1800~2400원의 수당을 받았다. 그가 집안 소유의 여러 농장을 관리하기 위해 1924년 설립한 삼수사(三水社)는 현 삼양사의 전신이다.
그는 조선총독부에 상당한 금액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박물관 건설비로 1만 원을 내고 총독부로부터 감수포상을 받기도 했다. 또한 1942년 5월 30일자 <매일신보>에는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의 사임을 아쉬워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폐질환을 이유로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같은 해 8월 공판에서 무죄를 언도받았다. 현 김윤 삼양 회장이 김연수의 손자다.
삼양 관계자는 “유족이 이의신청을 했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민족문제연구소가 자기들 기준에 맞춰 발간한 사전에 대해 우리가 따로 입장을 표명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라며 “예전에 관련성이 없다고 나온 사안을 다시금 들춰내는 의도를 알고 싶다”고 반문했다.
조선왕조의 핏줄이면서도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이해승(1890~1957). 그는 그랜드힐튼서울호텔의 이우영 회장의 할아버지다. 이해승은 합병 직후 조선총독부로부터 21세라는 가장 어린 나이로 후작작위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조선 귀족들이 일왕의 성은에 감읍하고 사회의 모범이 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는 조직인 조선귀족회 이사에 선정됐다.
그는 특히 1942년 5월 30일자 <매일신보>를 통해 “총독의 조선동포 통치를 감사하며 이에 감격하여 마지않는다”며 일제에 충성을 표현한 바 있다. 이해승은 해방 후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기소돼 7월에 불구속 상태에서 특별검찰부로 송치되었으나 반민특위가 와해된 후 그 처리결과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우영 회장 측은 민족문제연구소에 직접 이의신청을 했다고 한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이 회장 측은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면서 “반민특위 때도 문제 삼지 않은 일을 사설 단체가 나서서 친일명단에 올려도 되는 것이냐”고 따졌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이 사실일 순 있으나, 증명할 수 있는 어떠한 문서도 없는 주관적인 주장이었기에 기각처리 했다”고 밝혔다.
정유진 인턴기자 kkyy122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