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과거사 규명 문제와 관련해 정면충돌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이부영 열린우리당 신임 의장. 이종현 기자 | ||
외형상 양측의 대립은 전선을 끊임없이 확대해 나가며 사생결단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8·15 경축사를 통해 일제 강점하 친일 진상규명과 권위주의 정권 시절 국가 공권력의 인권탄압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을 강조하자,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나흘 후 “해방 후 친북-용공 행위도 규명하자”(8월19일)며 ‘맞불’을 놓고 나섰다.
여기에 ‘과거사 바로잡기’를 주도하던 열린우리당 신기남 전 의장이 선친의 일본군 헌병 오장(伍長) 복무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퇴하는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또 신 전 의장에게서 의장직을 물려받은 이부영 의장은 “박 대표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해방 후 국군 내 (공산주의자) 프락치 총책이며, 배신과 변신에 능했다”며 받아쳐 논란은 가닥을 잡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게 꼬여가기만 하는 형국이다.
양측의 과거사 공방은 이변이 없는 한 신행정수도 건설 문제와 함께 9월 정기국회의 풍향을 가를 ‘핫 이슈’가 될 것이란 예상이다. 그러나 선공에 나선 여권이나 ‘확전’을 통해 방어에 나선 한나라당 모두 복잡한 내부 사정 때문인지 그다지 전의에 불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정쟁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 과거사 공방에 노 대통령과 박 대표 등 여야 최고지도자가 매달리는 것에 대한 비판 여론이 팽배한데다, ‘신기남 케이스’처럼 유탄에 맞아 희생되는 사례가 재발할 것이란 불안감도 커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여권은 내년 1~2월 열린우리당 전당대회 당권경쟁을 겨냥한 계파간 암투가, 한나라당은 과거사의 ‘덫’에 걸려 우왕좌왕하는 ‘박근혜 체제’에 대한 회의론이 불거져 정국의 불투명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과거사 전선의 이면에서 깊어가는 여권과 한나라당의 고민을 들춰봤다.
우선 여권은 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분열과 반목은 굴절된 역사에서 비롯됐으며, 이제 분열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며 국회 내에 과거사 진상규명특위 구성을 제안한 후 ‘과거사 드라이브’에 매진하기로 입장을 정리했다. 당 지도부는 노 대통령의 ‘지침’이 나오자 “올바른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진상을 명확히 밝혀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한다”(천정배 원내대표)며 환영의 뜻을 분명히 했다.
![]() |
||
▲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과거사 강경 드라이브’에 대해 천정배 원내대표와 김혁규 중앙위원이 견제구를 날리고 있다. | ||
그러나 광복절 다음날인 8월16일 신 전 의장 부친의 일제하 친일 행적 의혹이 불거지면서 분위기는 변하기 시작했다. 신 전 의장이 사실상 ‘유고’ 상태에 빠져들면서 향후 당 운영을 둘러싼 계파간 ‘힘 겨루기’가 구체화되기 시작한데다, 여권의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과거사 규명이 결국 ‘자신이 발등을 찍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중 ‘포스트 신기남’을 둘러싼 논란은 19일 신 전 의장이 사퇴하고 1월 전당대회 지도부 경선에서 3위를 차지한 이부영 상임중앙위원이 의장직을 승계하는 것으로 ‘봉합’이 됐지만 본격적인 갈등은 이제 시작이라는 평가다. 그동안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 트리오를 내세워 당 운영을 독점해 왔던 당권파는 당초 비당권파와 ‘재야 운동권 출신’이란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이 의장의 ‘등극’을 저지하고, 대신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당을 끌고 간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계열인 국민정치연구회(비당권파)가 이 의장의 의장직 승계를 강력주장하고, 친노 그룹도 문희상 의원 등이 비대위 안을 주장하다 막판에 비당권파에 동조하고 나서자 결국 ‘이부영 의장’카드를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됐다.
당권파는 그러나 이 의장을 내세운 비당권파의 당 운영 주도는 허용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표명하고 나섰다.
특히 정동영 전 의장의 입각, 신 전 의장의 사퇴로 당권파의 유일 구심점이 된 천정배 원내대표가 과거사 규명에 대한 이 의장의 초강경 대응에 브레이크를 걸고 나선 것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천 대표는 이 의장이 박 전 대통령에 ‘국군 내 프락치 총책’ 등의 표현을 동원하며 한나라당과 대립각을 세우고 나서자 23일 느닷없이 야당이 요구하고 있는 ‘국회 밖 진상규명기구 설치’를 수용할 수 있음과 ‘과거사 관련 통합 입법’이란 당론을 수정할 수 있음을 밝혔다.
당내에선 이를 두고 “원내를 장악한 당권파가 원외인 이 의장과 비당권파가 당 운영을 주도하려는데 대해 견제에 나선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계파 갈등이 내년 1~2월 전당대회 당권경쟁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과거사 드라이브에 대한 회의론은 정체성 논란의 단초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노 대통령과 이 의장 등 여권 수뇌부의 강경한 입장에 대해 적극 반기를 들고 나서지는 않지만 못마땅해 하는 기류는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열린우리당 내 실용파의 ‘좌장’격인 김혁규 상임중앙위원은 당내 공식회의(23일 상임중앙위원 회의)에서 “친일 진상규명과 역사 바로 세우기도 중요하지만 우선 순위가 있어야 한다. 국민은 정치인들이 경제 살리기에 주력하라고 요구하는 만큼 이번 정기국회에서는 경제 살리기에 더 주력해야 할 것이다”며 과거사 규명에 ‘올인’하려는 지도부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실제 실용파 의원들은 청와대의 눈치를 보며 개혁과 민생을 오락가락하는 당 지도부에 대한 불신을 공-사석 가릴 것 없이 표명하고 있다.
![]() |
||
▲ 박근혜 대표의 실책이 이어지자 당 안팎에선 김덕룡 원내대표 등 핵심당직자들이 직언을 못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론이 일고 있다. | ||
한나라당의 고민은 여권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대부분 박 대표의 문제로 집중된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여권의 과거사 공세의 핵심 타깃이 박 대표의 ‘개인사’로 설정되어 있는데다, 이에 대한 대응에서 박 대표가 ‘자충수’를 연발하면서 후유증이 당 전반에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정체성’에 대한 문제제기(7월21일)에 이어 친북-용공 진상규명 요구(8월19일) 등 박 대표의 과거사 대응에 당내 상당수 의원들이 “이게 아닌데…”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박 대표의 정국 대응에 가장 심각하게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측은 그동안 박 대표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해온 초·재선 중심의 개혁그룹이다. ‘합리적 중도 보수’노선을 주장해온 이들은 과거사 전선에서 박 대표가 보여준 모습이 4·15 총선 이후 변신을 위한 당내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짓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 초선 의원은 “우려했던 대로 박 대표가 선친 문제 등 개인적 과거사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선 평상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힌 것 같다. 구체성 없이 정체성 논란을 제기했다 지지율이 폭락하는 사태를 경험했으면서도 ‘친북-용공 규명’ 주장을 다시 들고 나온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실 유신시절 반공을 내세운 정권의 폭압에 직간접적으로 시달린 경험이 있는 나 같은 세대들에게 박 대표의 그 같은 주장은 양자간에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을 확인시켜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고 말했다.
영남권 한 재선 의원은 과거사 대응을 통해 박 대표의 당내 여론에 ‘귀를 닫는’ 당 운영 스타일과 주변의 ‘인적 장막’의 문제가 그대로 노출됐다고 지적했다. 당내 보수그룹의 핵심 멤버인 이 의원은 “주변 선·후배 의원들 중 박 대표가 국가 정체성과 과거사 진상조사 확대 등 정국현안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의논해 봤다고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나마 박 대표가 밥도 사주면서 가끔 만난다는 수도권 초·재선 의원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더라. 이회창 총재 시절에도 당이 이처럼 한 사람의 뜻에 따라 우왕좌왕한 적은 없었다. 박 대표가 길을 잘못 가면 김덕룡 원내대표 등 핵심당직자들이라도 그러지 말라고 충고해야 하는데 ‘지당하십니다’만 연발하고 있으니 잘못됐어도 한참 잘못됐다. 이러니 무슨 일이 터지면 박 대표와 당직자만 여권에 맞서 싸우고 대다수 의원들은 아예 손 놓고 있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당 핵심 인사들 사이에서도 박 대표의 과거사 대응에 대한 비판이 적지않다. 한 인사는 “당의 노선과 이미지를 기존의 ‘극우’에서 좀 더 중도로 이동시켜야 하는 것이 당내 대다수 의원들의 견해인데 박 대표의 최근 행태는 그와 반대로 가는 것 같아 걱정이다. 여권의 과거사 공격에 보다 의연하고 전략적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박 대표가 ‘친북-용공도 규명해야 한다’는 식으로 ‘뒷북치기’ ‘따라가기’식으로 대응하다 보니 당이 과거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며 고민을 토로했다.
이 인사는 “박 대표가 자신을 얽매고 있는 과거의 고리들을 지금이라로 끊어나가야 한다. 그래야 박 대표 개인의 정치적 진로도 열 수 있고, 한나라당의 ‘업 그레이드’도 가능하다. 문제는 절대 다수의 의원들이 지난 총선에서 박 대표에 신세를 진 탓에서인지 작금의 상황에 대해 우려는 하면서도 싫은 소리를 하려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갑갑함을 토로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