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봉·대기업 CEO 날리려 했다”
정윤회 씨 국정 개입 의혹 문건이 정국을 뒤흔들고 있는 가운데 <일요신문>이 비선라인들 간에 벌어진 또 다른 인사 힘겨루기 정황을 포착했다. 사진은 정윤회 씨(왼쪽)와 박지만 회장. 사진제공=한겨레, 연합뉴스
국정기획수석은 청와대 아홉 명 수석비서관 중 좌장 격이다.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하던 유민봉 수석이 인수위를 총괄하는 국정기획조정분과 간사로 깜짝 발탁된 데 이어 국정기획수석까지 맡자 정치권에선 그를 친박 신주류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았다. 현 정부 조직개편 초안 작업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유 수석은 정무감각 부족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고 논리적인 업무 처리로 박 대통령 신뢰가 남다른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지난 6월 초 유 수석 사퇴 가능성이 담긴 정보가 시중에 은밀하게 돌았다. 참모진 개편이 임박했는데 유 수석도 포함될 것이란 얘기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유 수석이 공공기관 인사에 개입하고 있는 등 부적절한 처신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이번 기회에 정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세월호 참사 후 안전행정부 개편안을 발표할 당시 정부가 보였던 혼선에 대한 유 수석 책임론도 담겨 있었다. 그 후 몇몇 언론에선 유 수석 사퇴를 점치는 기사를 보도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유 수석은 교체되지 않았다. 관련 정보들은 루머로 판명 났던 셈이다. 그런데 최근 정윤회 문건 파문이 불거진 후 당시 유 수석을 둘러싸고 파워게임이 벌어졌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어 관심을 끈다. 이는 <세계일보>를 통해 공개된 문건에서 정 씨와 3인방 등이 김기춘 실장 교체 가능성을 논의했다는 것과 상당히 흡사하다. 문건에 따르면 김 실장 역시 올해 초 물러났어야 하지만 여전히 근무하고 있다. 유 수석 역시 김 실장과 마찬가지로 정 씨 측에서 퇴진을 검토했으나 무산됐다는 것이다.
정윤회 씨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박지만 EG 회장의 한 측근은 “유 수석 퇴진설 역시 정 씨 측 작품”이라고 주장하면서 “유 수석이 (정 씨 측이 건넨) 민원을 잘 챙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여권 핵심부 관계자 역시 “유 수석을 놓고 문고리 권력 쪽에서 사퇴를 밀어붙였던 움직임이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지 않았고 유 수석이 그들에게 밉보였다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유 수석 사퇴에 대한 보고가 박 대통령에게까지 전해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 역시 정윤회 문건과 마찬가지로 김 실장 선에서 ‘킬’ 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귀띔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측 입장을 듣기 위해 관련 담당자에게 여러 차례 전화와 문자를 남겼지만 별다른 답을 듣지 못했다.
한 대기업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과정들은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고위 임원들이 정 씨 측을 비롯한 여권 최고 실세들에게 줄을 대려 온갖 수단을 동원했던 모습들이 포착됐다. 특히 최고경영자를 끌어내리기 위한 이사회 장악 과정에서 정 씨와 박 회장 이름 등이 빈번하게 등장했다고 한다. ‘내 뒤에 누가 있는데’, ‘VIP(대통령) 뜻이나 다름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는 해당 대기업 간부, 앞서의 박 회장 측근, 복수의 사정당국 관계자들 말을 종합하면 내용은 이렇다.
유민봉 국정기획수석. 이종현 기자
해당 대기업 임원들과 접촉했던 사업가는 “내가 정 씨와 친분이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먼저 연락이 와서 여러 번 만나게 됐다. 회사 내부 사정을 말한 뒤 최고경영자 교체를 도와달라며 정 씨가 힘을 써줬으면 했다”며 “그래서 이를 정 씨에게 전달했다. 정 씨가 구체적으로 움직인 건 아니었지만 관심을 보이긴 했다”고 말했다. 이 사업가에 따르면 대기업 임원들은 정 씨가 자신들 배후에 있다는 소문을 회사 내에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일요신문>은 정 씨 입장을 듣기 위해 여러 번 통화를 시도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앞서의 박 회장 측근은 “그 회사가 잘 굴러가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고위 임원들이라는 사람들이 돈 버는 것보다는 정치에만 관심이 있더라. 정 씨 측 인사들이 그들과 만나서 어울린다는 소문을 들었다”면서 “정 씨 쪽은 잘 모르겠는데 우리한테 도와달라고 한 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지금 보면 알겠지만 박 회장이 무슨 힘이 있느냐. 또 있더라도 그런 기업 인사에 관여하는 분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박 회장 이름을 팔고 다니는 것”이라고 전했다.
청와대 수석, 대기업 최고경영자 자리를 놓고 벌어진 이러한 사례들은 얼마 전 정 씨 문건을 통해 수면 위로 드러난 정권 실세들 간 권력 다툼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대통령 동생, 막후 비선실세, 참모들이 얽히고설켜 갈등 양상을 보이는 까닭에서다. 이에 대해 정치권에선 정 씨와 참모 3인방으로의 과도한 힘 쏠림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집권 초부터 쌓이기 시작한 이들에 대한 불만이 문건 유출을 계기로 봇물처럼 터지고 있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의 한 친박 의원은 “이번 사태를 정윤회와 박지만의 대결로 좁혀선 안 된다. 정윤회와 참모 3인방을 향한 여권 내 비토 기류가 폭발한 것이다. 문체부 인사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정 씨와 관련된 고급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문건 파동을 계기로 보안을 강조하는 박 대통령 특유의 인사 스타일과 의사 결정 체계도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사실 정 씨를 둘러싼 여러 의혹은 박 대통령 의원 시절부터 끊임없이 불거졌던 것이다. 박 대통령이 공식 라인보다는 막후 비서실장으로 불렸던 정 씨 및 보좌관들과 주요 현안을 결정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나 정 씨를 언급하는 것은 친박 내에서 금기로 통했다. 이를 어긴 친박 인사 여러 명이 박 대통령으로부터 외면을 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의 친박 의원은 “예전보다 판이 커졌을 뿐이다. 비슷한 일은 여러 번 있었다. 친박 중진 의원들조차 지금 참모 3인방으로 불리는 박 대통령 보좌관 눈치를 보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며 “의원 때야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지금은 좀 상황이 다르다. 대통령이 정 씨와 참모 3인방에게 의존하다 보니 사달이 난 것”이라고 꼬집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