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권력에 갇힐까, 넘을까
검찰이 3일 서울 도봉경찰서 정보과 사무실을 압수수색 했다. 이곳은 청와대 내부 문건 유출 의혹을 받고 있는 박관천 경정의 근무지다. 구윤성 기자 kysplanet@ilyo.co.kr
<세계일보> 보도로 정 씨의 국정개입 의혹이 담긴 내부 문건이 공개된 후 청와대 측의 고소와 수사의뢰가 나오면서 검찰은 관련 수사에 착수한 상태다. 특히 문건유출 과정을 들여다보기 위해 검찰 제1 화력이라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까지 동원된 상태다.
고심 끝에 사건을 둘로 쪼개 수사하기로 한 검찰은 <세계일보> 보도에 대한 명예훼손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부장검사 정수봉)에, 문건 작성자이자 유출자로 지목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 박관천 경정(48)에 대한 수사의뢰 사건을 특수2부(부장검사 임관혁)에 각각 맡겼다. 두 사건 모두 특수수사를 전담하는 유상범 서울중앙지검 3차장이 총괄 지휘한다.
검찰은 수사 착수 후 고소인인 청와대 인사들 측 변호인인 손교명 변호사를 소환해 조사하고, 3일에는 박 경정의 자택과 근무지인 서울도봉경찰서, 자료 유출 진원지로 의심되는 서울지방경찰청 정보분실 등을 압수수색하는 등 발 빠른 초기수사에 나섰다. 4일에는 박 경정을 소환해 문서 작성과 유출 경위를 조사했다. 5일에는 관련자들의 통신기록을 확보해 분석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검찰 주변에서는 시작부터 ‘한계가 명확한 수사’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청와대는 이번 사태에 대해 ‘문건유출’이 가장 큰 문제라고 프레임을 설정한 상태. 검찰에 이미 수사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투 트랙 수사에 나선 검찰도 문건유출 부분을 특수부에 맡겨 이쪽에 힘을 싣고 있다.
검찰은 사건 배당 후 언론에 배포한 자료를 통해 “검찰은 국정 운영의 핵심기관인 청와대 내부의 문서가 무단으로 유출된 것은 중대한 범죄로 인식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건의 중심점을 ‘무단유출’ 쪽에 두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셈이다. 문건 내용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정확하게 청와대의 사건 인식 방향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가장 큰 관심사는 정말 정 씨가 비선조직을 운영하면서 국정 운영에 개입했는지 여부다. 이 같은 내용이 담긴 보고서가 청와대 내부에 보고된 공식 문서라는 점을 청와대까지 인정한 이상 내용의 진위 여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으로서도 권력의 보위에 앞서 국민들 앞에 진실을 낱낱이 밝힐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문건의 진위 여부가 어떤 형태로든 확인될 필요가 있다.
이번 사건은 이미 청와대 내부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지경에 와버렸다. 이미 정윤회 씨뿐 아니라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52), 청와대 측 등이 각자 입장차를 드러내며 언론을 통한 대리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박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 EG 회장(56)까지 의혹의 중심에 서면서 논란만 확산되고 있다. ‘지라시 수준의 내용’이라며 내용의 진위 확인 필요성을 부정하는 청와대 입장만으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명예훼손 고소 사건의 경우 해당 문건의 사실 여부는 사법처리 과정에서 중요한 대목이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명예훼손 여부와는 상관없이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 처벌 근거가 약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와대 공식 문건이었다는 사실을 청와대 스스로가 인정한 상태다. 검찰 내부에서도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고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차원에서 성역없는 수사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만만찮다.
이 같은 기대에도 불구, 검찰이 ‘성역없는 수사’를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난해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에서 청와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수사를 했다가 수사검사들이 잇달아 좌초되고 채동욱 검찰총장까지 청와대 사찰을 당한 끝에 혼외자 논란으로 불명예 퇴진한 전력이 있다. ‘살아있는 권력’의 힘을 또렷하게 경험한 검찰이 반기를 들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정권을 겨냥한 수사가 나올 수 있는 건 임기 말이나 돼야 가능한데, 지금처럼 권력의 힘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검찰은 절대 무리한 수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민감성을 감안해서인지 검찰 내부에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한 언급을 극도로 자제하는 모습이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일부러 사건에 관심을 안 갖고 있다. 수사팀도 부담이 상당할 것”이라고 했다.
이번 사건에 대한 긴장감은 서초동 주변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법조계를 담당하는 사정기관의 한 IO(Intelligence Officer, 정보업무 담당자)는 “정보를 담당하는 IO들 사이에서도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정보수집조차 자제하는 분위기다. 정보공유가 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며 “윗선에서도 절대 무리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온다”고 말했다.
조정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