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상시에 7인회까지 등장 ‘갈수록 태산’
비선 실세 의혹을 받고 있는 정윤회 씨가 지난 10일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고발인이자 피고발인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평소 화통한 성격이라고 알려진 정 씨는 검찰에 나와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수사팀 관계자는 “카메라 앞에서뿐만 아니라 조사받을 때도 시종일관 당당했고 거침없이 입장을 밝혔다. 재벌 회장들이나 정권 실세들도 막상 조사실로 들어오면 주눅이 드는데 정 씨는 남달랐다”고 귀띔했다. 정 씨는 수사에 앞서 담당 검사에게 “나와 관련된 모든 의혹이나 궁금한 부분에 대해 주저하지 말고 모두 물어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고 한다. 또 정 씨는 수사 도중 서초동 인근 한식집에서 배달해 온 식사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는 후문이다.
정 씨는 자신을 기다리던 기자들에게 “이런 엄청난 불장난을 누가 했는지, 불장난에 춤춘 사람들이 누구인지 다 밝혀지리라고 생각한다”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조사실로 향했다. 자신이 3인방을 포함한 십상시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국정에 관여하고 있다는 내용의 문건을 만들어 유출한, 특정 세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정 씨는 문건을 작성한 박관천 경정과의 대질신문에서 “배후가 누구냐”며 격앙된 목소리로 물은 데 이어 박지만 EG 회장과의 대질신문을 요구했다. 정 씨의 ‘불장난’ 발언이 박 회장을 겨냥하고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검찰은 정 씨와 십상시 간 정기 회동, 김기춘 비서실장 퇴진 발언 등 문건에 담긴 내용에 대해 허위로 가닥을 잡은 상태다. 박관천 경정이 잘못된 제보를 바탕으로 문건을 작성했다고 보는 것이다. 검찰은 새정치민주연합이 고발한 문화체육관광부 인사 개입 논란도 정 씨가 직접 연루됐다는 구체적인 단서를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은 정 씨 관련 의혹은 빠른 시일에 마무리 짓고 수사의 또 다른 축인 문건 유출 부분에 화력을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검찰의 이러한 움직임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바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문건을 ‘찌라시’로 규정하고 도마에 오른 참모 3인방에 대해서도 재신임을 확인해준 상황에서 검찰로서는 수사를 발전시키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정치권과 사정당국 주변에선 정 씨가 검찰에 당당하게 출석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청와대가 사전에 가이드라인을 그어놨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비박계 중진 의원은 사석에서 “정 씨가 검찰에 나온 것은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검찰이 아닌 국정조사나 청문회를 통해 이번 사건을 조사해야 한다”고 꼬집기도 했다.
청와대가 정 씨의 검찰 출석을 앞두고 자체 감찰 결과를 발표한 것 역시 수사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청와대는 이 자료를 검찰에도 건넨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르면 청와대는 조응천 전 비서관이 주도하는 7인 모임이 정 씨 및 3인방과 관련된 허위 보고서를 만들어 유출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른바 신 7인회다. 여기엔 조 전 비서관을 비롯해 박관천 경정, 오 아무개, 최 아무개 전 청와대 행정관, 국정원 전직 간부 고 아무개 씨, 박지만 회장 최측근 전 아무개 씨, 신문사 간부 김 아무개 씨가 멤버로 참여하고 있다.
‘문고리 3인방’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왼쪽부터).
청와대의 이러한 감찰 결과는 공교롭게도 정 씨가 몇몇 언론 그리고 검찰 조사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상당히 흡사하다. 정 씨는 검찰에 출석해 ‘박지만 회장과 친한 조 전 비서관이 이끄는 민정라인에서 나와 3인방 관계에 대해 오해를 하고는 근거 없는 루머를 문건으로 만들어 흘린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청와대와 정 씨가 사전에 어느 정도 입장을 조율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어찌됐건 청와대 감찰 결과와 정 씨 주장이 사실이라면 대통령 핵심 참모가 특정 라인을 비방하는 허위 보고서를 만들어 윗선에 보고했다는 얘기가 된다. 사상 초유의 일이다. 더군다나 그 공격 대상은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3인방과 베일에 가려져 있던 막후 실세 정 씨였다. 적어도 친박계에선 ‘노터치’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다. 청와대 민정라인 근무 경력이 있는 사정기관 고위 관계자는 “공직기강비서관 파워가 세긴 하지만 대통령 최측근들에 대한 보고서를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조 전 비서관이 독자적으로 했을 것으론 보지 않는다”며 배후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7인회 당사자들은 대부분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조 전 비서관은 “청와대가 나를 엮으려고 7인회라는 말을 지어낸 것”이라고 반박했다. 청와대가 찌라시라고 일축한 정윤회 문건에 대해 “60%는 신빙성이 있다”고 했던 조 전 비서관이 또 다시 청와대를 향해 비수를 들이댄 것이다. 나머지 7인회 인사들도 모임 자체에 대해 “실체가 없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검찰은 조 전 비서관 등 7인회 인사들을 소환해 청와대 감찰 결과에 대한 확인 작업에 나설 예정이다.
박지만 회장
특히 7인회 중 전 아무개 씨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40대 초반인 전 씨는 10여 년 전부터 박 회장 대외 업무를 도맡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대선 때는 박 대통령 네거티브 대응팀에 몸담고 있던 조 전 비서관을 도왔다. 대선이 끝난 후 조 전 비서관은 국내 굴지 로펌에서 근무하던 전 씨를 청와대 민정으로 데리고 오려 했지만 3인방이 강하게 반대해 번번이 무산된 것으로 전해진다.
박 회장은 이에 대한 불만을 지인들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박 회장 측근은 “(박 회장은) 3인방이 전 씨를 막은 게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뭐 대단한 자리도 아니고 행정관 하나 달라는 것이었는데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고 털어놨다. 박 회장 주변에서는 전 씨 거취 문제가 정 씨와의 갈등을 지피는 도화선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그 후 박관천 경정, 조응천 전 비서관 등 박 회장 라인들이 줄줄이 옷을 벗자 이번 문건 사태가 발발했다는 것이다.
청와대로부터 감찰 자료를 받은 검찰 역시 박 회장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7인회 모임 성격을 규명하는 것과 함께 그 배후에 박 회장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까지 수사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박 회장 역시 예정돼있었던 지인들과의 해외여행을 뒤로 미루고 검찰 출석을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각에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박 회장이 입을 열어 반격에 나설 것이란 추측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앞서의 박 회장 측근은 “(박 회장은) 이번 사태가 누나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되고 있는지 잘 안다. 제기된 의혹에 대해선 충실히 해명하겠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박 회장은 최대한 조용히 마무리 지으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박 회장과 가까운 새누리당의 한 친박계 전직 의원은 “결과적으로는 박 대통령이 동생보다 정 씨에게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가 됐다. 검찰이 정 씨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박 회장을 옥죄어 간다면 상황은 급반전할 수 있다. 박 회장이 직접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폭로전을 이어갈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