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탈 털릴라’ 뜨끔…반기 내리고 백기
KB금융의 새로운 사외이사 인선 작업에 금융권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이른바 ‘정윤회 문건’과 ‘땅콩 회항’ 사건 등으로 정·재계가 시끌벅적하던 지난 10일 저녁, KB금융 사외이사들이 갑작스럽게 한 장의 문서를 언론에 배포했다. ‘알려드립니다’라는 제목의 문서에는 앞의 짤막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틀 뒤인 12일로 예정돼있던 이사회에 앞서 의견조율차 모였던 사외이사들이 갑자기 전원 일괄사퇴 결정을 내린 것.
이보다 앞선 지난 5일에도 한자리에 모여 거취를 논의했지만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했던 이들이 만장일치로 사퇴키로 하자 금융권에서는 배경을 놓고 궁금증이 커졌다. 사외이사들은 거듭된 금융당국의 퇴진압박에도 “부당한 압력에 굴복할 생각이 없다”며 끝까지 임기를 마칠 것임을 공언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들의 사퇴 결심 배경은 KB금융의 LIG손해보험 인수 승인에 걸림돌이 되지 않겠다는 대승적 차원의 결단이다. KB금융은 이미 몇 달 전 LIG손보 인수자로 결정됐지만, 자회사로 정식 편입하기 위해서는 금융당국의 승인 절차가 필요하다. 당국은 “KB금융의 지배구조가 투명하지 않다”며 자회사 편입 결정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사외이사들이 물러나지 않으면 LIG손해보험의 KB금융 자회사 편입을 허가해주지 않겠다’는 으름장을 에둘러 표현한 셈이다.
당국은 금융감독원장 사퇴까지 불러온 ‘KB금융 사태’에 사외이사들도 책임이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이들 가운데 일부는 금융당국이 임영록 전 KB금융지주 회장의 해임을 추진하던 당시 강한 불만을 표하며 끝까지 반대했던 인물들로, KB금융 사태를 꼬이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이 당국의 시각이다. 게다가 이들은 스스로의 거취에 대해서도 ‘부당한 압력’을 거론하며 당국에 맞서는 모습을 보였다.
이쯤 되자 금융당국이 꺼내든 카드가 바로 지배구조와 LIG손보 자회사 편입 승인을 연계하는 방안이다. 금융위원회는 “KB금융의 지배구조와 관련된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승인을 미루며 사외이사들을 압박했다. 당국의 거듭된 으름장에도 사외이사들은 ‘버티기’에 들어갔고, 급기야 오는 24일로 예정된 정례회의에서는 자회사 편입 승인을 불허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낸다는 소문까지 흘러나왔다.
수천억 원짜리 인수·합병(M&A)이 자신들 때문에 무산될 수 있다는 점에 부담을 느끼면서 이들이 결국 일괄사퇴 선언을 했다는 것이 표면적으로 알려진 상황이다. 하지만 금융권의 깊숙한 속사정을 아는 고위층에서는 조금 다른 얘기가 들린다. 서슬 퍼런 당국을 향해 노골적인 반기를 들던 이들이 갑자기 대의명분을 위해 물러난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 힘들다는 것이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KB금융 사외이사들의 일괄사퇴가 11월 말 시작된 금감원의 전방위 조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금감원은 지난 11월 28일 KB금융에 대해 전격 검사에 착수했다. KB금융의 내부통제 시스템과 LIG손보 인수에 따른 사업계획 타당성 등을 점검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사외이사들을 조준한 ‘기획 검사’라는 시각이 존재했다. 실제로 금감원 검사팀은 KB금융 이사회 사무국에 회의록은 물론 기부금 내역서 제출을 요구하는 등 LIG손보 인수와는 무관해 보이는 내용까지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융회사들의 아킬레스건을 손금 들여다보듯 잘 아는 금감원의 공세에 이들이 버텨낼 재간은 없었을 것으로 금융권은 보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금감원은 사외이사들이 속한 단체나 법인에 낸 기부금 내역에서 ‘이상 징후’를 포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반적으로 기부는 사회공헌활동 차원에서 이뤄지는 만큼, 기부금이 제대로 사용됐다면 시비 거리가 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특정 사외이사가 선임된 뒤 갑자기 기부액수가 크게 늘어난 단체가 있거나 쏠림 현상이 나타났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엉뚱한 곳’에 돈이 흘러간 흔적이라도 있다면 최악의 경우 배임이 적용될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 기부금이다.
금융권에서는 그간의 관행에 비춰볼 때 KB금융 역시 기부금이 100% 적합하게 사용됐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한 금융사 고위 관계자는 “금감원이 터는데 먼지 안날 곳이 어디 있겠느냐”면서 “새로운 사외이사가 선임되면 예우차원에서라도 소속 단체에 대한 기부금을 늘리는 것이 암묵적인 관행”이라고 귀띔했다.
이제 기존 사외이사가 물러난 자리에 어떤 인물들이 앉을지가 금융권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금융당국은 개입을 최소화하겠다는 의사를 천명하고 있다. 금융위는 “KB금융 사외이사는 사회통념에 부합해야 한다”는 정도의 원칙론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기류로 볼 때 새 사외이사 선임에는 정부 측 입김이 적잖이 작용할 전망이다. 최근 정치권의 ‘정윤회 문건 파문’만큼 금융권엔 ‘서금회(서강대 출신 금융인 모임)’, ‘신관치’ 논란이 거센 까닭에서다.
게다가 KB금융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며 정부와 금융당국에 대한 소비자 불신을 키우는데 한몫을 했던 장본인인 만큼 ‘특별관리’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조만간 이뤄질 KB금융의 새로운 사외이사 인선 작업에 금융권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