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 뛰고 원룸 살고 그들도 ‘장그래’였다
‘진짜 회사원’ 같은 연기로 tvN 드라마 <미생>의 극적 사실감을 끌어올린 조연 배우 전석호, 태인호, 김종수(왼쪽부터). 방송화면 캡처.
<미생>은 집요하리만치 직장생활 하나의 주제만 다룬다. 드라마의 필수 요소로 통용돼 온 남녀의 로맨스는 찾기 어렵다. 몸값 높은 스타 배우 대신 얼굴과 이름이 낯선 연기자들을 전면에 내세운 전략도 통했다. 주인공 장그래 역의 임시완과 그의 상사 오 차장을 연기하는 이성민, 신입사원 강소라, 강하늘 정도를 제외하면 <미생> 출연진 대부분은 ‘어디서 본 듯한’ 연기자들이다. ‘진짜 회사원’ 같은 이 연기자들이 만드는 이야기가 시청자에겐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는 평가다.
그 가운데서도 전석호와 태인호, 김종수는 단연 화제다. 가히 <미생>을 통해 인생역전의 기회를 잡은 분위기다.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고,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 역시 불과 두세 달 전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전석호(30)는 주인공 강소라(안영이 역)를 괴롭히는 직속상관 하 대리를 연기하고 있다. 여자 후배를 시종일관 무시하는 행태 탓에 시청자들로부터 ‘공공의 적’이라고 손가락질도 받는다. 이런 격한 반응은 반대로 풀이하면 그만큼 맡은 배역을 적절하게 소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10여 년 동안 대학로 연극 무대에서 갈고 닦은 실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전석호는 대학로 대표 극단인 연우무대 출신이다. 배우 김윤석 등이 한때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대학로에 터를 잡은 그는 서른 살이 된 지금까지 연극 외엔 다른 곳으로 눈을 팔지 않았다. 단역으로 얼굴을 비춘 영화 몇 편이 전부다. 직업이 배우이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때론 연기와 무관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게 돈을 벌어 자신이 주도하는 연극 공연에 쏟아부을 때도 있었다.
소속사도 없는 전석호는 손수 운전을 하고 의상을 챙기며 촬영장을 오간다. “연극을 할 때부터 늘 그래왔기 때문에 낯선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곧 그가 처한 ‘상황’은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미생> 출연을 계기로 몇몇 매니지먼트사로부터 전속계약 제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종수가 전석호와 찍은 사진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모습.
태인호의 고향은 부산이다. 경성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그는 부산 지역 극단에서 활동하다 2008년 ‘더 넓은 세상’을 꿈꾸며 서울로 상경했다. <댄싱퀸> <신세계>처럼 흥행한 영화에도 간혹 참여했지만 모두 ‘단역’이었던 탓에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관객은 거의 없다. 그는 “서울에서 살았던 7년 동안 드라마 출연 제의를 받은 건 서너 번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마저도 번번이 최종 단계에서 탈락했다. 상당한 대사와 상황이 주어진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건 성 대리가 처음이다.
30대에 접어들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전석호, 태인호와 달리 김종수(50)는 50대에 인생역전을 맛봤다. 극 중 김부련 부장 역을 맡은 그는 출연하는 내내 ‘진짜 부장님 같다’는 말을 듣곤 했다. <미생> 연출자인 김원석 PD 역시 김부장 역을 두고 고심하던 중 김종수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우리 회사 부장님 같다”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그 뒤 캐스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김 PD의 예상은 적중했다. 김종수는 조직을 이끌며 부하들을 챙기지만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눈을 질끈 감는 노련한 모습을 보여주며 <미생>의 완성도를 높였다.
김종수는 현재 서울에 원룸을 얻어 생활하고 있다. <미생>의 인기 덕에 여기저기서 출연 제의를 받으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그의 고향은 울산이다. 연기를 해왔던 터전 역시 울산이다. 현지에서 진행되는 각종 연극 무대를 진두지휘했고 울산배우협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울산에만 머물 것 같았던 그의 활동 무대는 올해 MBC가 방송한 드라마 <개과천선>을 계기로 서울로 넓어졌고, 이번에 출연한 <미생>으로 더욱 확실해졌다.
김종수는 43세던 2007년 영화 <밀양>에 출연하며 처음으로 연극 이외의 영역에 도전했다. 당시 잠깐 등장한 부동산 사장 역을 시작으로 2012년 영화 <풍산개>에선 망명한 북한 간부로 얼굴을 비췄다. 출연작 수가 늘었지만 그의 이름이 알려진 건 <미생>을 통해서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미생> 출연을 계기로 이젠 서울에 살면서 더 많은 작품을 해도 된다고 인정을 받은 기분”이라고 했다.
무명의 배우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안긴 <미생>이 주연 배우들에겐 ‘광고 행운’을 만들어줬다. 장그래를 연기하는 주인공 임시완은 10여 개 브랜드로부터 광고 모델 제의를 받은 상태다. 자동차와 금융, 통신, 아웃도어 등 주요 브랜드를 섭렵했다.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성실한 이미지가 광고주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셈이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