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동안’도 ‘떠나는 순간’도 무소유
▲ 위 사진은 일평생 무소유의 정신을 실천한 법정스님의 다비식이 지난 13일 순천 송광사에서 거행됐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아래는 법정스님의 생전 강연 모습(왼쪽)과 길상사 곳곳에 걸린 스님의 글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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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은 지난해 2월 선종한 고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아름다운 종교 화합의 모습을 몸소 실천해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한국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산문집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법정스님은 주옥같은 저서를 다수 발간해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스님이 입적한 뒤 전국 각지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추모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소유’로 돌아간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따라가 봤다.
봄눈에 하얗게 햇살 비추던 날 큰 산은 그리움을 남기고 그렇게 떠나갔다. 법정스님이 남긴 마지막 향기를 기억하고자 사람들은 길상사에 차려진 분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글귀에서 삶의 위안을 얻고 희망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무소유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법정스님은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살았다.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법정스님은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목포상고를 거쳐 전남대 상대 3학년 때인 1954년 오대산을 향해 떠났다. 하지만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의 선학원에서 당대 선승인 효봉 스님을 만나 대화하고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았다. 이튿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 생활을 시작한 스님은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이후 해인사 선원과 강원, 통도사를 거쳐 1960년대 말 봉은사에서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1975년 10월부터 17년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았으며 불일암 시절 초반인 1976년 4월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를 출간한 이후 불교적 가르침을 담은 산문집을 잇달아 내면서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1992년부터는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지내면서 외부인과의 접촉을 잘 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6년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을 기부받아 1997년 12월 길상사를 개원한 후에는 정기적으로 대중법문을 들려줬다.
스님은 <무소유>를 비롯해 <서있는 사람들> <물소리 바람소리> 등 널리 알려진 여러 저서를 냈다. 이외에도 <아름다운 마무리> <일기일회> 등 담담하면서도 정갈한 글쓰기로 출간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로 손꼽히게 됐다.
법정스님은 ‘맑고 향기롭게’라는 환경보호와 생명사랑을 실천하는 모임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자연과 교감하는 시간도 가졌다. 이계진 한나라당 의원 역시 ‘맑고 향기롭게’ 모임에서 활동했다. 이 의원은 자신에게 법명(향적)을 지어준 법정스님과 함께 활동하면서 이 모임의 이사직을 맡기도 했다.
사회 각계각층에는 사상과 종교를 초월해 법정스님과 친분을 맺어온 인사들이 많다. 특히 지난해 2월 선종한 고 김수환 추기경과는 종교의 벽을 허물고 아름다운 화합의 모습을 보여줬다.
스님은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 개원법회에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해 축사를 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발행하는 평화신문에 성탄메시지를 기고했다.
스님은 또 1998년 2월 24일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신자 1800여 명 앞에서 ‘나라와 겨레를 위한 종교인의 자세’라는 주제의 특별강연을 열어 ‘무소유’의 정신으로 당시의 IMF 경제난국을 극복하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2000년 4월 28일 봉헌된 길상사의 관음보살상의 제작을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자 조각가로 명성을 날렸던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에게 맡겨 또 한번 화제가 됐다.
또한 스님은 천주교 수녀원과 수도원에서도 자주 강연을 했고, 그의 산문집과 경전번역서들은 수녀들 사이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 초기불교 연구로 유명한 일아스님 등 일부 수녀 출신 비구니 스님들은 법정스님의 저술에 감명을 받거나 법정스님과 만난 후 비구니가 됐다는 출가 이력을 소개하기도 했다.
암투병 중인 이해인 수녀 역시 법정스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야단맞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오라’며 다정한 삼촌처럼, 때로는 엄격한 오라버니처럼 법정스님은 이해인 수녀와 따뜻한 인연을 맺어 온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법정스님은 천주교 신자인 류시화 시인과 20여 년 동안 특별한 인연을 맺어왔다. 류 시인은 법정스님과 집필활동도 함께했다.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산에서 꽃이 피네>는 법정스님의 법문과 말씀을 류 시인이 뽑아 엮은 것으로 많은 사람들의 책장에 꽂혀있는 책 중 하나다.
류 시인은 법정스님의 와병생활부터 마지막 이별의 순간까지 곁에서 함께 했다. 그는 법정스님의 입적 후 자신의 홈페이지에 ‘산이 산을 떠나다’란 제목으로 법정스님과 함께했던 순간들을 글로 남겼다. 그는 “치료되었다고 믿었던 폐암이 작년에 재발한 이후 강원도에서, 그리고 제주도에서 치병을 하면서 스님께선 ‘이 육체가 거추장스럽다’는 말을 자주 했다”며 “기침이 심했고, 통증이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체중이 점점 줄어 나중에는 걷는 일조차 힘들어질 때 이 육신이 나를 가두고 있다고 말했다. 새장에 갇힌 새를 보는 것 같아 뒤에서 눈물을 쏟은 적이 여러 번이었다”고 적었다.
법정스님은 4년 전 폐암이 발병해 몇 차례 수술과 치료를 받아왔다. 지난해 4월 몸이 좀 나아진 스님은 길상사에 법문을 와 “몸이 잘 말을 안 듣는다”고 말해 참석자들과 불교계에 아쉬움을 던져주기도 했다. 지난해 겨울에는 강원도에서 제주도로 거처를 옮겨 요양을 했지만 병세가 악화됐고, 이후 삼성서울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하지만 3월 11일 오전 위급한 상황을 맞자 법정스님은 그의 뜻대로 길상사로 옮겨 눈을 감았다. 상좌스님들이 입적 하루 전날 병원에서 돌아가시는 것보다는 절에서 돌아가시는 것이 좋다는 뜻에서 “길상사로 가시겠냐”고 물으니 법정스님이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2009년 6월 법정스님은 류 시인을 비롯해 가까운 지인 서너 명을 불러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스님은 이들 지인들에게 “절대로 다비식 같은 것을 하지 말라. 이 몸뚱아리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커다란 넓적바위가 있으니 남아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놓고 화장해 달라.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 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며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는 유언을 남겨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가 평생을 설파한 ‘무소유’로 돌아가고자 했다.
조계종과 법정스님의 출가본사인 송광사, 법정스님이 창건한 길상사 등은 장례절차를 논의한 결과 ‘일체의 장례의식을 거행하지 말라’는 법정스님의 유지에 따라 별다른 장례행사는 치르지 않고 13일 오전 11시 송광사에서 다비식을 거행했다. 또 조화나 부의금도 일체 받지 않기로 했다.
또 별도의 장례위원회는 구성하지 않았으나 다비식은 법정스님 입적 전에 장례절차를 논의하던 송광사 문중의 ‘다비준비위원회’가 맡아서 진행했다.
스님의 분향소가 마련된 서울 길상사를 비롯해 순천 송광사와 인근의 불일암 등 3곳에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몰려든 신자들과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서귀포를 떠나기 전 ‘죽음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류 시인에게 “죽음은 우레와 같은 침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고 답했다고 한다. 많은 이들의 가슴에 따뜻한 꽃을 피우고 그리운 침묵 속으로 돌아간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새로운 시작을 본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