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와 마라톤 위해 한평생 달렸다
▲ 1996년 필자가 손기정 옹에게 IOC의 올림픽 100주년 기념패를 증정했다. | ||
내가 손기정을 처음 본 것은 5세 때 대구 만경관에서 영화를 통해서다. 조선민보사에 재직중이던 선친(김도학)을 따라 가서 베를린올림픽 공식영화 ‘민족의 제전’을 통해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을 본 것이다. 당시 손기정은 2시간 30분대를 깨고 2시간 29분 19초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1위로 골인하고는 쓰러졌고 이어 남승룡이 2시간 31분 32초의 기록으로 3위로 들어왔다. 요즘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이때 손기정과 2위 영국 선수와의 숨막히는 접전은 역사에 남을 명승부로 손색이 없었다. 당연히 손기정이 42.195km를 달려 우승한 것은 거의 전설이 되었고 아이들이나 일제치하의 한민족 전체가 기뻐하는 대단한 뉴스였다. 그 후 전국의 어린이들이 마라톤이나 장거리 달리기를 하게 되었다. 또 어깨 너머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살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다섯 살 위의 형(김호용)으로부터 들었다.
당시 대구 만경관의 분위기는 정말 대단했다. 2층까지 입추의 여지없이 붐볐고 몰려든 사람들의 열기는 뜨겁기만 했다.
사실 손기정은 올림픽 선발전과 파견 과정에서 일본인들로부터 온갖 차별을 당했다. 실력 하나로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베를린까지 갔고, 올림픽의 꽃을 석권한 것이다. 이는 동메달을 딴 남승룡도 마찬가지였다. 손기정은 명치신궁 대회 때는 2시간 26분대로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일본사람들도 손(孫)을 마고(まご, 孫의 일본발음)라고 애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손기정의 올림픽 제패 직후 일어난 일장기(일본국기) 말살사건은 <동아일보>의 이길용 기자(이태영 전 <중앙일보> 체육부장의 부친)가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우고 사진을 보도한 사건을 말한다. <동아일보>는 그때 정간 처분을 받았고, 나중에 한국체육기자연맹이 주축이 되어 한 명씩 공로가 큰 체육기자를 뽑아 수상하는데 바로 그 상의 이름이 ‘이길용 체육기자상’이다. 상의 이름이 제대로 붙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시상에는 체육회장으로서 필자도 참석했다.
나중에 들으니 손기정은 마라톤을 안 하는 조건으로 일본 명치대학으로 보내졌다 한다. 안 그래도 세계 2차 대전이 시작되자 군국주의 일본은 서양에서 들어온 스포츠는 못하게 하고 검도, 유도, 총검술, 스모를 장려했다. 또 손기정이 마라톤을 계속 했다고 해도 어차피 1940년 도쿄올림픽, 1944년 헬싱키올림픽은 세계대전으로 잇달아 취소되었기에 올림픽 2연패는 불가능했다. 베를린올림픽 경기장의 기념비에 손기정의 국적이 일본으로 되어 있어 말소 노력이 끊임없이 시도되었으나 IOC는 국적을 안 바꿔준다. 일본 국적으로 올림픽 최고의 금메달을 땄으니 손기정은 압박에 시달리던 한국민족의 기개를 높이고 용기와 긍지를 심어준, 역사에 영원히 남을 비운의 스타가 된 것이다.
손기정이 해방 후 환호 속에 서울운동장에 다시 나타났을 때 필자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차편이 없어 겨우 미군 군용기 신세를 지고 미국 보스턴에 간 서윤복이 1946년 보스턴마라톤에서 2시간 25분 3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 완전한 독립을 향해 달리고 있는 국민을 감동시킬 때 손기정은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 활약했다. 선수로 올림픽을 제패했고, 지도자로 세계 최고의 마라톤 대회 우승을 일군 것이다. 서윤복이 김구 선생을 찾았을 때 선생이 족패천하(발로 천하를 제패했다)라는 휘호를 써내려가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이때는 아직 대한민국이 올림픽에 출전하기도 전이었다. 당연히 지금처럼 태릉선수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연금이나 보상금도 없었다. 모든 것을 선수 스스로 꾸려 나갈 때였다. 이어서 최윤칠이라는 선수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필자도 고교시절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5000미터 경주에 나간 일이 있는데, 당시 처음부터 선두로 달리는 경복고의 최윤칠을 뒤따라 쫓다가 몇 바퀴 만에 기권한 일이 생각난다. 최윤칠은 그때 “밥이나 한번 실컷 먹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곤 했다. 삼각산을 뛰어오르며 맹훈련을 했고, 런던올림픽 때 좋은 성적이 기대됐지만 다리에 쥐가 나는 바람에 기권하는 아픔도 겪었다. 최윤칠은 다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 출전, 남자 마라톤에서 2시간 26분대의 올림픽신기록으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승을 차지한 체코의 ‘인간기관차’ 에밀 자토페크 등에 밀려 4위로 들어왔다. 최윤칠의 말에 다르면 한참 달리고 있는데 한국임원이 “3위다, 3위다”라고 해서 마음 놓고 들어와보니 4위였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손기정을 생각할 때는 늘 그의 넓적한 얼굴을 가득 채우던 따뜻한 미소가 떠오른다. 스포츠 발전의 형태를 살펴보면 해당 종목의 저변이 넓어진 후 거기서 훌륭한 선수가 나오기도 하고, 또 거꾸로 뛰어난 선수가 나오면 모두가 그 선수를 따라 운동을 하다 저변이 넓어지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피라미드’를 바로 놓기도 하고, 거꾸로 놓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독일에서 슈테피 그라프(Stefie Graf)와 보리스 베커(Boris Becker)가 나오니 독일 국민이 테니스를 즐겼다. 한국 마라톤도 마찬가지다. 손기정의 뒤를 이어 많은 훌륭한 선수들이 배출됐다. 물론 암흑기도 있었지만 멀리 서윤복, 최윤칠 그리고 가까이는 황영조, 이봉주 등이 대표적인 선수다.
▲ 위 사진은 필자와 바르셀로나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아래는 필자가 이봉주(왼쪽에서 세 번째)와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 | ||
손기정은 이후 이승만 박사의 도움으로 용산에서 조그마한 과자 공장을 경영했었는데 자유당 말기 어수선한 상황에서 사업이 잘 될 리가 없었다. 이후 내가 청와대에 근무하고 있을 때 그의 가족이 도움을 요청하러 집에까지 찾아온 적이 있었다. 당시 내 힘으로는 도와줄 수 없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 후 손기정은 서울올림픽 개회식 때 성화주자로 주경기장을 한 바퀴 돌면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의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4년 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는 사마란치가 특별 초청하여 그가 베를린에서 우승한 지 꼭 56년 만에 황영조가 몬주익 주경기장에 태극기를 달고 1위로 들어와 우승하는 모습을 감격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때도 그는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사람을 감싸 안는 듯한 그 멋진 미소는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육상연맹, 대한체육회 임원으로 늘 미소와 함께 한국 체육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필자가 대한체육회장, KOC위원장으로 재직할 때 그를 고문으로 추대했다. 서윤복도 필자에게 한국육상의 장래를 걱정하여 육상 재건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줬다.
손기정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지만 한 번도 스스로 손을 내미는 일이 없었다. 그만큼 강직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것이다. 손기정은 평생을 조국과 마라톤을 위해 달리고, 생각하고, 걱정하는 외길의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후배들이 이를 큰 교훈으로 받아주었으면 한다.
서울올림픽 때 그가 베를린에서 받은 월계관과 철모가 돌아왔다. 그리고 나중에 그 월계관과 황영조가 주물로 만든 발 모형을 필자에게 기증해왔다. 내가 갖고 있기가 아까워서 무교동의 체육박물관에 기증하여 전시해 놓았는데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보관하는지 알 수가 없다.
1991년 유니버시아드대회 마라톤 우승자 황영조가 다크호스로 주목은 받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우승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다만 박정기 육상연맹 회장이 필자에게 “3위는 가능하다”고 했는데 운동시합은 끝나봐야 아는 것이라 솔직히 별로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남자마라톤 경기가 열린 폐회식 날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 사마란치 위원장과 버스를 타고 가면서 황영조가 일본선수 모리시타 코이치와 각축을 벌인다는 뉴스를 들었다. 이후 황영조는 놀라운 막판 스퍼트를 선보여 당시 주경기장을 메운 관중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황영조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마라톤에서도 1위로 골인했는데 당시 필자는 평화기념관 앞 골인지점에서 네비올로(Nebiolo) 국제육상연맹 회장과 함께 이를 지켜보았다. 이때 황영조는 마치 100미터 경주 같은 놀라운 스피드로 골인하고도 기운이 넘치는 듯했다. 골인 직후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축하 전화가 온 것도 기억난다. 황영조는 그 후 각종 마라톤을 휩쓸었지만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을 앞두고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엄청난 심폐기능과 강한 승부근성 등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마라토너 황영조는 일찌감치 은퇴한 후 부침이 잦았던 것으로 안다. 지금은 실업팀 지도자와 국가대표 마라톤 기술위원장을 한다고 들었다.
IMF 이후 삼성의 이대원 회장이 육상연맹을 맡았는데 연 11억 원의 지원으로는 가장 중요한 육상이 쉽게 재건될 리가 없었다. 기본종목인 육상은 선수 한 사람을 키우는 데 10억 원 이상이 든다고 할 때였다. 지금처럼 생색내는 차원의 투자로는 세계적인 육상선수나, 마라톤 선수가 나오기 힘들다. 1년 뒤 대구에서 세계육상선수권이 열리는데 한국 육상은 아직도 먼 길을 가야할 듯싶다.
이봉주도 정말 역사에 남을 선수다. 필자는 이봉주가 애틀랜타올림픽 마지막날, 남아공 선수의 마지막 스퍼트에 밀려 3초 차이로 2위에 들어오는 순간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바르셀로나에 이어 한국이 남자마라톤 2연패를 달성하는구나 하며 큰 기대를 했는데 아깝게 놓쳤다. 막판 뒷심이 달린 것이었다. 하지만 꼭 올림픽 우승자가 최고의 선수는 아니다. 투과니라고 하는 남아공 선수는 이후 이렇다할 성적 없이 쉽게 잊혀졌지만 이봉주는 지난해까지 세계 톱랭커로 13년을 더 달렸다.
1996년 이봉주는 일본 후쿠오카국제마라톤에서 투과니를 꺾고 우승했고 1998, 2002년 아시안게임에서 2연패를 달성했다. 선수생활 20년 동안 하루에 5시간씩 뛰었는데 이는 지구를 4바퀴나 돌고도 남을 정도라고 하니 정말 대단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어진 길을 포기하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삶의 미학을 이봉주는 보여준 것이다. ‘국민 마라토너’라는 별명이 아주 제격이다. 아직도 한국 마라톤(2시간7분20초)과 하프마라톤(1시간1분4초)의 기록은 이봉주의 것이다. 이제 스포츠행정가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한다고 하니 건투를 바란다.
끝으로 우리는 우승한 스타만 보지, 그 스타를 뒤에서 키워놓기 위해 온 힘을 다한 감독이나 코치 등 지도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마라톤을 말할 때는 고 정봉수 감독을 잊을 수 없다. 또 보이지 않게 꾸준히 후원을 아끼지 않아온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의 공헌도 반드시 되새겨야 할 것이다. 한국 마라톤이 다시금 세계 최고의 자리에 서는 날을 간절히 기대한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