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자녀들 평생 학비 지원’ K 대표-“지켜라” A 교수-“무효다”
<일요신문>이 단독으로 확보한 민사소송 1심 판결문에 따르면 A 교수는 2007년 3월 29일 95억 500만 원을 편취·횡령한 혐의로 검찰에 피소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A 교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람은 ‘정보통신업계의 여걸’로 통하는 A 사의 K 대표. 하지만 K 대표의 고소장은 접수된 지 2개월 뒤인 5월 29일 각하됐다. 검찰 조사 단계에서 A 교수로부터 합의서 및 확약서를 받은 K 대표가 고소를 취하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합의로 사건이 종결된 듯 보였으나 A 교수가 합의를 이행하지 않자 K 대표는 2008년 10월 서울중앙지법에 민사소송을 제기하면서 두 사람의 송사는 민사로 옮겨져 진행되고 있다. 2009년 10월 1심 재판부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고, 한 달 뒤인 지난해 11월 양측이 모두 항소를 해 현재 서울고등법원에 사건이 계류 중이다.
‘장관보다 10배는 명예롭다’는 서울대 총장의 차기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됐던 A 교수가 복잡하고 지리한 송사에 휘말린 내막을 들여다봤다.
사건은 약 3년 전 K 대표가 A 교수를 검찰에 고소하면서 시작된다. <일요신문>이 확보한 서울중앙지법의 판결문에 따르면 A 교수와 K 대표가 알게 된 것은 지난 1998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K 씨가 대표로 있는 A 사에 기술고문으로 재직하던 A 교수는 1999년 5월 26일경부터 2000년 10월 18일경까지 1년 5개월여에 걸쳐 총 95억 500만 원을 편취·횡령한 혐의로 2007년 3월 27일 K 대표로부터 서울중앙지검에 고소를 당했다.
하지만 같은 해 5월 21일 서울중앙지검에서 대질조사를 받던 중 A 교수는 K 대표에게 합의금 및 K 대표 슬하의 두 자녀의 평생 학비 전액을 지급하기로 하는 ‘합의서와 확약서’를 작성해 교부했고, 이에 K 대표는 이날 A 교수에 대한 고소를 취하했다. 고소 당사자였던 K 대표가 고소를 취하하자 검찰은 사건을 각하했다.
횡령이나 배임 등 특가법 위반 혐의로 고소장이 접수됐어도 수사 전 단계에서 고소 당사자가 고소를 취하하면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하지 않고 소를 각하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게 법조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민사사건 1심 판결문에 따르면 ‘A 교수가 작성한 합의서와 확약서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교수는 K 대표에게 2007년 5월말까지 5억 원, 2007년 9월 30일 2억 원, 2008년 2월 28일 2억 원 등 총 9억 원을 지급한다. 또 경기도 소재 모 골프장 회원권을 양도하고, 경기도 양평군에 소재한 1000여 평의 땅을 명의양도한다’는 것이었다.
특이한 점은 2008년 8월 학비분부터 K 대표 슬하의 두 자녀 평생 학비 전액을 고지서와 함께 청구하는 날부터 2주 이내에 지정한 통장으로 현금지불한다는 내용이 합의서에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 간에 채권채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해도 굳이 K 대표가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학비 지원을 평생동안 A 교수에게 요구했다는 게 쉽게 납득이 가질 않기 때문이다.
K 대표가 고소를 취하한 이후 A 교수를 상대로 또다시 민사소송을 제기한 배경에도 자녀들에 대한 학비 지급 문제가 걸려 있었다. A 교수가 K 대표 자녀의 학비지급 부분에 대한 약정을 다음과 같은 이유 등을 들어 ‘무효’라며 이행하지 않으면서 사건은 제2 라운드를 맞았다.
우선 학비를 청구하는 과정에서 K 대표는 두 자녀의 개인비용과 용돈·식비를 포함시켜 청구했으나 A 교수는 개인비용 등을 학비로 보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또 K 대표는 자녀의 대학교 학비가 전년도 학비보다 7.28% 상승했으므로 매년 학비가 7.28%씩 상승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A 교수는 그 사실만으로 매년 7.28%씩 학비가 상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맞서고 있다. 뿐만 아니라 K 대표가 학비를 학기가 개시되기 이전에 청구한 것과 중간 이자 현가계산에 대해서도 양측은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에 대해 1심 법원은 지난해 10월 20일 판결문을 통해 “피고(A 교수)는 원고(K 대표)에게 두 자녀의 학비를 변론종결일인 2009년 9월 22일 매매기준환율인 1달러당 1205.8원의 비율로 환산하고, 차남의 2010, 2011, 2012년도 학비에 대해서는 2008년 11월 14일 당시 기준 단리할인법에 따라 산정한 학비 총계 3억 6619만 3855원을 지급하라”고 주문했다.
A 교수 측은 1심 변론을 통해 K 대표에게 작성한 합의서 및 확약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고소취소 및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지 않게 할 의무와 K 대표에게 9억 원 이상의 재산 및 그 자녀들의 평생학비를 지급할 의무사이에 현저한 불균형이 존재하며 K 대표가 자신을 고소해 자신의 궁박한 상태를 이용해 이뤄진 경우로서 민법 제104조에서 정한 불공정한 법률행위로서 무효이며 K 대표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이므로 민법 제110조에 의해 이를 취소한다는 게 골자다.
A 교수 측은 또 A 교수가 K 대표 자녀들의 학비를 지급하지 않자 K 대표는 학비의 추심을 제3자에게 의뢰하고 연락을 받지 않는 A 교수에게 재고소를 운운하는가 하면 학교 측(서울대)에 이를 알리고 언론에도 제보하겠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면서 압박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원고가 피고 자녀의 학비부분을 제외하고는 합의서 및 확약서 상의 의무들을 별다른 이의없이 모두 이행한 점 등으로 보아 원고가 합의서와 확약서 작성 당시 궁박 상태에 있었다거나 피고가 강박상태를 이용했다거나 피고가 원고를 강박해 작성했다는 점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A 교수 측은 또 “K 대표가 자녀들의 학비를 A 교수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K 대표와 자녀들 사이의 부모·자식 인연을 끊겠다는 것이며, A 교수가 K 대표 자녀들의 평생 학비 전액을 부담하는 경우 자신의 가정도 파탄시킬 수 있다”며 약정이 ‘반사회질서의 법률행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확약서에서 정한 자녀들의 평생 학비 지급채무는 자연채무(소를 제기해 이행을 강제할 수 없는 채무. 꼭 갚아야 하는 책임이 없는 채무)에 불과해 원고가 피고에게 그 이행을 소로써 구할 수 없다”는 A 교수 측의 항변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자녀 학비 지급채무가 자연채무라는 점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심 재판부의 판결에 대해 A 교수 측과 K 대표 측 쌍방이 항소해 현재 사건은 서울고등법원에 계류 중이다. 따라서 양측의 팽팽한 법정 투쟁은 항소심 결과 및 대법원 최종 판결까지 지루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사법부의 최종 판단 여부를 떠나 이 사건이 주목받고 있는 것은 피고인 A 교수가 한때 유력한 차기 서울대 총장 후보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실제로 A 교수는 서울대 25대 총장 선거에 입후보하는 등 열정적인 행보를 보였다. 특히 A 교수는 이번 서울대 총장 선거의 핵심 이슈 중 하나인 세종시 문제와 관련해 세종시 융복합 캠퍼스에 대한 포부를 밝히는 등 서울대 발전 전략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A 교수는 3월 25일 총장후보초빙위원회가 최종 후보를 3인으로 압축하기 이틀 전에 후보를 전격 사퇴했다. 현재 맡고 있는 교직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지가 얼마되지 않았고, 현안이 있는 상황에서 이를 뒤로하고 총장 선거에 나서는 데 따른 부담으로 인해 고심 끝에 총장 후보를 사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력한 차기 총장 후보로 거론됐던 A 교수가 갑자기 후보를 사임한 배경과 관련해서도 갖가지 뒷말이 나돌고 있다. 특히 <일요신문>은 A 교수가 후보를 사퇴하기 전부터 그의 송사 내막을 집중적으로 취재하고 있었다. 기자는 수차례 A 교수 휴대폰으로 문자를 넣고 대학 사무실에 메시지를 남겨 송사 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을 요청한 바 있다. 이런 와중에 A 교수는 25일 전격 후보 사임을 선언했고, 다음날(26일) 기자에게 연락을 해 왔다.
A 교수는 기자에게 먼저 “억울하다”며 운을 뗐다. 그는 “형사 고소 내용은 사실무근이다. 순수하게 도와준 것뿐인데 이를 역이용해 괴롭히고 있다. 배은망덕한 행위로 명예훼손감이다”고 주장했다. 기자는 A 교수에게 송사 문제와 관련해 갖가지 질문을 했으나 A 교수는 “소송이 진행 중이니 만큼 조금만 기다려 달라” “기회가 되면 제일 먼저 찾아가 해명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
‘총장 후보 사퇴와 송사가 관련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A 교수는 “전혀 무관하다. 간접적으로 교수님들을 접촉한 결과 공과대학에서 잇달아 총장이 배출되는 것에 대한 학내의 부정적인 분위기가 감지돼 사퇴한 것뿐이다”고 답했다.
한편 기자는 원고인 K 대표의 입장도 들으려 했지만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