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오발사고’로 사망한 장병의 빈소를 찾은 이부영 의장. 국회사진기자단 | ||
그런데 이 의장 체제 탄생의 산파 역할을 했던 여권 내 재야세력 사이에서 이 의장에 대한 비토론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신임 의장직에 오른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이 의장이 자신의 지지기반이라 할 수 있는 재야세력 사이에서 점차 신망을 잃어가고 있다는 평이 나오는 것이다.
지난 1월 정동영 전 의장 체제가 출범하고 정 전 의장 주도하에 치러진 4·13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면서 여권 내 재야세력의 목소리는 그만큼 작아지게 됐다. 여권 내 주요 정책 결정에서 ‘아웃사이더’ 역할을 해왔던 재야세력은 그러나 이부영 의장 체제 출범을 계기로 여권 운영 전면에 나서면서 ‘천·신·정’ 계보 이상의 결집력을 다지게 됐다. 이 의장 체제 출범이 그들의 도약의 분명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의장 체제가 들어선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재야세력 내에선 이 의장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확산되고 있다. 이 의장에 대해 “천·신·정보다 낫지만 당의장감은 아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당 운영을 저렇게 해선 안된다”는 비판이 여권 내 일부 재야 출신 의원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내년 1월 전당대회 전까진 비교적 순항할 것으로 보였던 이 의장의 입지가 갑작스레 흔들리게 된 배경에는 국가보안법(국보법) 개정·폐지 논란이 깔려있다. 재야세력이 국보법 폐지 의견으로 일찌감치 방향을 잡았지만 이 의장은 정작 개정론에 무게를 두는 스탠스를 보였다. 이 의장 측근으로 각인돼 있는 안영근 의원은 여권 내 국보법 개정론을 주도해 왔다. 안 의원은 신기남 전 의장 사퇴 직후 기존 당권파가 비대위 구성을 추진하자 이부영 의장의 당의장직 승계 당위성을 공론화시키며 재야세력의 이 의장 지지를 촉발시킨 주역이다.
안 의원이 당내 여론 주도를 하고 있는 국보법 개정에 공개적으로 찬성하고 있는 인사들은 이용희 정세균 배기선 유재건 의원 등 3선 이상의 중진과 강봉균 김진표 이근식 정덕구 조성태 정의용 의원 등 관료출신, 김혁규 이계안 의원 등 실용주의 그룹이 주축이다. 대부분 정동영 전 의장이 총선 직전 직접 영입했거나 ‘천·신·정’중심의 당권파와 궤적을 같이 해온 인사들이다.
국보법 위반 혐의로 수차례 옥살이를 한 이 의장은 지난 8월28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국보법 논의와 관련해 “내가 갖고 있는 개인사하고 혼동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는 이틀 전인 8월26일 천정배 원내대표가 MBC 라디오에서 “(국보법을) 폐지하면 대체입법 사이에 시간적 공백이 있을 수 있다”고 신중한 자세를 보인 것과 맥을 같이 한다는 평이다.
반면 국보법 폐지를 주도해 온 인사들은 친 김근태 성향의 재야인사들과 유시민 의원을 주축으로 하는 개혁당그룹 출신들이다. 이 의장 체제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한 이들 재야세력이 자신들의 반대파나 다름없는 친 정동영계 인사들과 이 의장측 인사가 궤적을 같이 하는 것에 대해 고운 시선을 보낼 리 없다.
물론 여기에는 이 의장의 개인적 소신이라기보다는 청와대의 의중을 고려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따랐다. 최근 이해찬 국무총리가 이부영 의장과의 회동에서 “정치적으로 볼 때 폐지보다 개정이 낫지 않느냐”고 말한 것으로 전해져 국보법 개정에 힘이 실렸던 것으로 관측됐다.
그러나 지난 5일 갑작스레 노무현 대통령이 국보법 폐지 입장을 밝히면서 이 의장은 국보법 논의에서만큼은 ‘할 말 없는’사람이 돼 버렸다는 평이다. 이 의장은 노 대통령의 언급을 사실상 당론 결정에 방향타로 삼을 것이라 하면서 야당의 변화를 촉구했지만 당초 개정론에 무게를 두었던 이 의장에 대해 재야세력 인사들 사이에서 ‘영이 서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노 대통령의 국보법 폐지 관련 언급 이후 정동영 통일부장관도 “국보법 폐지는 정부 공식 입장”이란 의견을 밝혀 이 의장 운신의 폭을 좁아지게 만들고 있다.
여권 내 재야세력 사이에서는 “이 의장이 내년 전당대회 이전까지 ‘관리형 의장’이 아닌 본격적 정국 주도권을 쥔 ‘실세형 의장’으로 부각되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과거사·국보법 정국에서 자신이 유신시대의 피해자임을 강조하며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몰아붙이는 것도 정동영 김근태 두 장관이 잠시 떠난 정치판에서 정국을 ‘이부영 대 박근혜’ 구도로 만들겠다는 취지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재야 출신 인사는 “김근태 장관이 주변 시선을 고려해 당내 계보 모임 참석도 안하고 정치적 활동을 중단한 과정에서 재야세력 도움으로 당의장직에 오른 이 의장 행보에 의구심을 보내는 시선이 많아졌다. 그의 나이를 볼 때 대권에 욕심 낼 마지막 기회 아닌가. 재야세력 사이에서 이 의장까지 잠룡 대열에 합세하려 한다면 당내 재야세력이 어렵사리 잡은 정국 주도권을 내년 전당대회에서 다시 빼앗길 가능성이 높다”라며 이부영 비토론 확산 분위기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