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조금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 1997년 김우중 회장이 대권 도전 선언을 한 뒤 다음날 “자신의 발표를 취소한다”고 번복했다. | ||
대우그룹이 성장할 때는 모든 기업이 나라로부터 금융 및 세제 지원을 받아 수출입국, 산업화에 앞장서는 시기였다. 이런 때, 즉 제3공화국 시절 빈곤탈출에서 수출입국으로 나아갈 때 김우중은 정말이지 혜성과 같이 나타나 수출의 대명사처럼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대우 삼성 현대 모두 좋은 인재들이 많았고 제조업보다 무역으로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김우중은성과은 주로 외국에 나가 살다시피했다. 집안을 챙기는 일이 적었던 것 같다. 물론 다른 재벌회사가 그랬듯이 전자, 자동차, 금융, 조선 등으로 셕과했으며 스포츠(그 시절 국책사업), 대학, 문화, 합창단, 장학사업 등에도 손을 댔다. 확실한 것은 1990년까지만 해도 외국에서는 대우가 현대나 삼성보다 더 유명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김우중, 덕성무역의 김종수 사장, 그리고 다른 한 명 이렇게 세 명이 기업을 시작했으나 곧 갈라섰다. 이때 정부는 신용장(LC)만 가져오면 대금을 지불하고 엄청난 세제혜택도 줬다. 심지어 사정기관의 보호까지 받기도 했다. 그래서 급성장한 기업이 많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중공업 육성까지 가려면 자본축적이 되어야 하고 그래서 재벌도 육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매년 들어오던 미국의 경제원조 3억 달러-군사원조 3억 달러도 해마다 줄어들고 있었다.
1973년 연세대 동문모임에서 필자의 7년 후배인 김우중은 ‘자랑스러운 연세인상’을 처음으로 받았다. 필자도 개인적으로 그때 처음 만났다. 그는 언제나 몸이건 마음이건 가만히 있지 않았다. 특히 머리는 항상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그가 재벌이 된 후에도 옆에서 지켜보면 아주 소박하다는 인상을 자주 받았다. 비행기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땅바닥에서 누워 자기도 했다. 필자도 외국에 자주 다닐 때라 비행기 안에서 조우할 때가 많았다. 서로 바쁘다 보니 술자리를 가진 적은 없었다.
한번은 비행기 안에서 마주쳤는데 “형님, 태권도를 올림픽에 넣으려고 애쓰시는데 꼭 넣으셔야지 만약 못 넣으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을 겁니다. 꼭 넣으세요”라고 했다. 그때는 필자도 과연 아직 국제화가 덜 된 태권도를 올림픽에 넣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을 때였는데 세계경영을 하던 그는 이미 그런 조언을 할 정도로 시선을 멀리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쨌든 그 격려는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대우가 서울역 앞에 건물을 사서 지금의 대우 건물을 지으려고 할 때 민정수석(김시진)실에서 대우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부산관세청에서 대우창고를 압수수색했고 당시만 해도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던 대우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
하루는 필자의 비서(김정재)가 “김우중 사장이 예고 없이 정문(청와대)에 와있습니다”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들어오게 해서 애로사항을 들었다. 곧 아래층에 있는 김시진 민정수석실에 가서 내용을 물었더니 대우를 구할 사람은 박종규 경호실장밖에 없다는 답이 나왔다. 도와주고 싶으면 박종규 실장에게 부탁하라는 것이었다. 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때는 자본 축적과 기업의 성장 및 보호가 국가 정책일 때였던 까닭에 박 실장이 얘기를 듣고 실제로 대우를 구제했다.
이를 인연으로 그 후 김우중 회장은 나를 만나러 몇 번 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구제된 대우는 곧 서울역 앞에 기념비적인 대우 본사건물을 완공시켰다. 대우빌딩은 서울역으로 상경한 사람들이 그 위용을 보고 ‘아 여기가 서울이구나’라고 감탄을 하던 발전한 서울의 대명사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 이런 대우빌딩의 탄생 비화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1981년 독일 바덴바덴이었다.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한국 지도층이 대거 몰려갔을 때였다. 참고로 전두환 대통령 말에 의하면 이규호 당시 문교부 장관이 “국운융성의 호기는 올림픽 유치”라고 건의할 때 자신은 IOC가 있는 줄도 몰랐다고 했다. 어쨌든 당시 공식 대표단 6명과 국제회의 대표(김택수, 김운용, 박영수, 정주영, 이원경, 이원홍, 유창순, 조상호) 외에도 대대적인 지원단을 보냈는데 김우중 대우 사장도 포함됐다. 들러리 지원팀 격이라고 할 수 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김우중 사장의 모습을 자주 봤다.
또 다시 만난 것은 88서울올림픽을 준비할 때였다. 소련 등 동구권과 길을 트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특히 필자는 TV방영권과 소련 등 동구권 참가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었다.
필자는 IOC와 함께 소련 등 동구권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가능한 길은 다 열었다. 마침 이때 기업들도 소련 진출의 길을 트기 위해 노력을 했다. 당시에는 외교관계가 없었기에 소련에 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심지어 직접 통신 수단도 없었다. 이런 시기에 소련 진출을 희망한 국내기업은 KAL 대우 롯데 등이었다. 회사 이름 자체가 큰 곳으로 뻗어나는 것이고 김우중 회장도 ‘세계경영’을 표방했으니 당연한 이치였다.
▲ 1997년 연세동문회 새해인사의 밤에 참석한 김우중 전 회장과 필자. | ||
소련과의 국교가 선 후 북방외교에 열을 올리던 때 김우중 회장은 소련 폴란드 우즈베키스탄 헝가리 체코 베트남 중국 미얀마 등에 진출하여 사업을 확장시켰다. 이때 KAL의 조중건 부사장이 테니스 회장이었다. 그 자격으로 소련에 가서는 교통항공성 장관과 만나서 하늘 길을 텄다. 88올림픽 기간 중 소련선수단을 수송한다는 명분으로 KAL기를 모스크바에 띄운 것이 효시가 돼 소련으로 KAL 정기 운항이 시작된 것이다. 또 롯데(장성원 사장)는 백화점을 레닌그라드로 진출시켰다.
김우중 회장은 88서울올림픽 직후 소련에 대우자동차를 줬다. 이후 소련 경제가 어려웠을 때 모스크바에 가보니 스미르노프(Smirnov) IOC 위원 등이 대우차를 얻어 타고 다니고 있었다. 또 소련 선수단 600명에게는 사마란치가 대우의 소형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구매해 선물했다.
한국은 88서울올림픽 때만 해도 경제구조가 취약하고 정부도 힘이 모자라 각 기업의 수장에게 경기단체를 하나씩 맡겼다. 축구와 근대5종은 대우, 농구는 코오롱, 배구는 효성, 테니스는 KAL, 탁구는 동아건설, 수영과 양궁은 현대 등으로 말이다. 서울올림픽 때 대우가 요트연맹도 맡아 부산의 수영비행장 근처 수영만에 요트경기장을 건설, 그곳에서 서울올림픽 요트경기를 치렀다. 지금은 이 수영만이 아파트 등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말이다.
김우중 회장은 요트 회장, 합기도 회장, 체육회 부회장, 축구 회장 등을 역임했다. 축구는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이 이어 받았다. 기억에 남는 일화도 있다. 하루는 김우중 회장이 합기도 회장이 되고 곧 합기도센터를 짓는다는 보도가 나왔다. 합기도의 통합과 세계화를 돕는구나 했지만 합기도의 복잡한 내막을 알고 있던 필자는 의아심이 들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김 회장은 곧 합기도 회장을 그만두어버렸다. 1968년 김신조 사건 이후 미 OSI의 청와대경호관 훈련에 대한 보답으로 필자는 합기도의 지한재, 오세림(후에 합기도 회장), 김홍래 경호관을 대동하고 워싱턴에서 OSI 요원들에게 무술훈련을 시킨 적이 있다. 김우중 회장이 합기도 회장을 맡았을 때 개인적으로 박종규 실장과 함께 합기도 발전을 늘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88서울올림픽 후에 북방외교 바람을 타고 대우는 M&A식으로 많은 회사를 인수하고 세계 특히 구라파지역으로 뻗어나가 외형적으로는 삼성, 현대와 맞먹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기업방식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가 오고 있었다.
1997년 대통령 선거 전에 갑자기 김우중이 대통령 출마를 발표해서 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그 다음날 취소 발표가 있었다. 얼마 안 가서 그는 전경련 회장이 되었고 연세대, 경기고의 동창회 회장도 맡았다. 그 당시 연세대 교사 건축은 대우가 주로 맡았다. 기업인이 대권을 꿈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일본도 대기업이 정치에 나가서 성공한 사례가 없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후 대우가 IMF 경제위기 여파로 파산하게 되고, 김우중 회장은 해외로 나가버렸다. 한번은 IOC에서 사마란치와 앉아있는데 미NBC TV의 부사장인 질라디(Gilady) IOC 위원이 <헤럴드트리뷴>지를 갖고 왔다. 대우그룹 노조가 김우중 회장을 잡기 위해 구라파로 떠났고, 이를 광고에 냈는데 문구가 ‘Wanted dead or alive’였다. 즉, 카우보이 영화에 범인잡기 광고를 흉내 낸 것인데 ‘죽이건 생포하건 상관없이 잡기를 원한다’는 섬뜩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질라디 위원도 “이것은 너무하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국가망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우그룹 해체 후 중국에 갔다가 대우의 중국본부 본부장 전병우를 만났다. 그리고 설명을 들은 후 크게 놀랐다. 대우가 중국에만 56개 회사를 가지고 있고 36억 달러 투자액 중에 27억 달러를 대우가 투자한 상태에서 연간 3억 달러의 이익을 올리고 있다고 했다. 대우는 망한 줄 알았는데 살아남아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우그룹은 한때 규모가 세계 18위로 연간 850억 달러를 수출하는 회사였다. 하지만 IMF와 과대한 확장(알맹이와 보유한 돈 없이)으로 아깝게 정리되었다.
김우중은 6년간의 외국도피를 끝내고 2005년 6월에 귀국, 재판(추징금 17조 9000억 원)을 받았고 2007년 말에 사면되었다. 아직도 병든 노구를 이끌고 후진양성을 돕고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명예회복을 간절히 바란다고 한다. 그의 경우 지난날의 과오도 있지만, 수출입국과 산업화시대의 선두주자로서의 공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항상 새로운 무엇인가를 고민하던 기업인 김우중, 축구를 그토록 좋아했던 대한축구협회장 김우중의 모습이 새롭기만 하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