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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그럴 듯했지만 결과는 너무나 ‘허무’했다. 문제 남녀가 경찰에 붙잡힌 것은 불과 범행 일주일 만의 일. 갖고 튄 18억여원은 ‘거의’ 손도 못댄 상태였다. 서울 중부경찰서는 지난 8월29일 우리은행 인천 주안지점 직원 서강희씨(가명•31)와 서씨의 남자친구 임정근씨(가명•41)를 업무상 횡령 혐의로 구속했다.
서씨는 은행업무 경력 14년의 베테랑 행원, 남자친구 임씨는 은행 창구에서 고객으로 만나 서씨와 인연을 맺은 사이였다. 주변 사람들은 평범하기만 했던 두 사람의 대담무쌍한 범행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과연 이들 남녀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돈을 들고 튀어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서강희씨가 은행원으로 첫발을 내딛은 것은 지난 88년,
A은행에 정식직원으로 채용되면서부터였다. 이번 사건의 공범인 임정근씨는 당시 서씨가 근무하던 은행 앞 건물에서 자동차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악연’의 시작이었을까. 거래관계로 A은행을 오가던 임씨는 서씨에게 이끌려 ‘접근전’을 펴게 된다. 이를 계기로 가까워진 둘의 관계는 약 2년간 지속됐지만 결혼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각기 다른 상대와 결혼하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됐던 것. 헤어져 지내는 동안 두 사람은 한 가지 비슷한 상처를 얻게 됐다. 먼저 서씨. 그녀는 임씨와 헤어진 직후 다른 남자와 결혼했지만 지난 98년 이혼하고 말았다. 지난 2000년 7월에는 ‘쉬고 싶다’는 말을 남긴 채 오랫동안 다니던 A은행마저 그만두게 된다.
그녀가 은행으로 돌아온 것은 지난해 3월. 계약직 신분으로 우리은행 인천 주안지점에 입사한 것이었다. 물론 그동안 임씨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역시 지난 99년 우여곡절 끝에 아내와 이혼을 했던 것. 서씨와 임씨가 숙명처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지난 5월. 거의 10년 만의 해후였다. 이번에는 서씨가 먼저 임씨를 찾았다. 임씨의 주민등록번호를 기억하고 있던 그녀가 은행의 전산망을 이용해 임씨의 소재를 찾아낸 것.
임씨를 다시 만나기 시작하면서 서씨는 자신이 키우고 있던 여덟 살 난 아들을 전 남편의 본가인 경남으로 보내고 인천 구월동의 원룸으로 떨어져 나왔다. 경찰 관계자는 이 즈음인 지난 7월 두 사람이 범행을 처음 계획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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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달 28일 범행 일주일 만에 경찰에 붙잡힌 서씨(왼쪽)와 임씨. 18억원을 탈취한 두 사람은 “일이 너무 커져 겁이 덜컥 났다”고 말했다. | ||
이 부분에 대해서는 피의자 임씨의 말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 임씨는 “지난 7월 말께 ‘그런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면서 일이 시작됐다. 실제로 그렇게 돈을 빼내는 것이 가능한지 궁금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다지 진지하게 논의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은행돈을 빼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사용처’도 생겼다.
‘사건 직후 숨어지내다가 잠잠해지면 사업을 시작해 잘 살아보고 싶었다’는 게 이들이 밝힌 범행동기. 통상적으로 한 명의 은행원이 하루에 전결할 수 있는 금액은 최대 5천만원선이라고 한다. 이것도 전담 직원의 온라인단말기 카드키를 이용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은행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던 서씨는 이러한 ‘원칙’과 현실이 꼭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즉 실제로는 워낙 은행 업무가 폭주하다보니 담당 은행원이 직접 상급자의 카드키를 가져다가 전결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실제로 서씨는 지난 8월21일 오전 9시38분부터 오후 3시26분 사이에 이런 방법으로 모두 20차례에 걸쳐 18억3천4백만원을 임씨 명의의 3개 은행계좌에 입금시켰다. 실제로는 현금이 입금되지 않았지만 단말기에 허위의 금액을 써서 입금시키는 이른바 ‘무자원 입금’ 방식. 임씨는 서씨가 자신의 계좌에 돈을 입금시키는 동안 경기도 일대의 은행 10곳을 돌며 전액 현금으로 이 돈을 인출했다.
미리 시나리오를 짜놓은 대로 서씨는 이날 오후 근무 도중 홀연히 사라졌다. 결국 기발한 수법으로 거액의 은행돈을 빼내는 데 성공한 서씨와 임씨. 하지만 범행의 꼬리가 잡히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범행직후 이들이 최초로 숨은 곳은 서울 강남구 역삼동이었다. 그곳에 범행 6일 전 이미 두 달치에 해당하는 2백50만원의 방세를 미리 지불하고 빌려놓은 주택이 있었던 것. 하지만 두 사람은 이곳에서 만 하루도 머물지 못하고 강원도 강릉으로 도피하게 된다.
이유는 예상을 벗어난 언론의 관심 때문이었다. 나중에 임씨가 “(이 정도는) 종종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방송에서 너무 크게 나와 덜컥 겁이 났다”고 말할 만큼 사건의 파장이 컸던 것. 서울에 숨는 게 불안해진 두 사람은 지난 8월22일 새벽 강원도 강릉으로 도피처를 옮긴다. 강릉은 임씨가 대학시절 머물렀던 곳.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돌봐줄 선후배가 있는 곳을 떠올렸던 셈이다. 빼돌린 돈은 공업용 박스와 여행용 가방, 007가방 등을 이용해서 옮겼다.
사건 초기 두 사람은 경찰의 전파추적을 염려해 자신이 사용하던 휴대폰의 전원을 꺼놓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하지만 학창시절을 보냈던 강릉에 도착해 마음이 풀어졌던 게 ‘화근’이었다. 이즈음 경찰은 이들의 모든 것, 특히 주변 사람들의 동향 하나하나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마침 그 수사망에 임씨가 한 친구의 명의를 빌려 새로 개설한 휴대폰 전파가 포착됐던 것. 거액의 은행돈을 횡령한 뒤 강원도 한적한 아파트에서 가슴 졸이고 살던 이들은 결국 범행 1주일 만에 도피행각에 마침표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