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2년 <문화일보> 기자 시절 DJ와 인터뷰 장면. 오른쪽은 고교 때 수학여행 가서 찍은 사진. | ||
열린우리당 민병두 의원의 개인사를 따라가 보면 문득 위 구절과 문맥이 맞닿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민 의원의 20대 청년 시절은 말 그대로 ‘왼쪽’ 인생이었다. 성균관대에 입학한 뒤부터 학생운동권의 대표적 ‘지하’ 이론가로 활동했다.
그는 81~82년, 87년 두 차례 복역하는 고초를 당한 끝에 90년에야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학림사건과 제헌의회사건 모두 국가보안법 3조(반국가단체 구성)의 적용을 받았는데 그는 이에 대해 “국보법 3조 위반만으로 두 차례나 감옥에 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국가보안법과의 악연을 되뇌었다. 그가 이번 국가보안법 폐지에 발 벗고 나선 것도 바로 이런 악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 운동가 민병두가 기자로 변신한 것은 지난 90년의 일이었다. 두 번째 감옥에 갔다가 출소한 뒤 출판사 기획사 등을 전전하던 중 그의 글재주를 눈여겨본 장을병 당시 성균관대 총장의 주선으로 <옵서버> 기자로 제 2의 인생을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문화일보> 창간과 함께 정치부 기자로 정치현장을 누비게 된다.
이때부터 그에게 ‘오른쪽’ 인생의 문이 열리게 되는지도 모른다. 재야의 대표적 이론가였던 그가 현실정치를 경험하는 기자가 되면서 ‘과격했던’ 그의 가치관도 많이 ‘중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내에서는 그를 재야출신임에도 비교적 중도파인 ‘민생파’로 분류하기도 한다.
기자 시절 그는 계속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을 출입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남다르다. 먼저 ‘뉴DJ플랜’이라는 신조어를 그가 처음 만들어냈다. 그는 지난 92년 봄 DJ가 평소에 하지 않던 양복의 행커치프(손수건)를 눈여겨본 뒤 그것에 대해 묻자 DJ가 “뉴DJ플랜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는 이를 곧 바로 기사화해 세간에 뉴DJ플랜 붐을 일으키며 DJ의 이미지 제고에 보이지 않는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좌우의 날개로 인생을 헤쳐나온 민병두 의원. 그는 지금 어디로 날아가고 있을까. 대답은 분명해 보인다. 민 의원이 이번 국회에 ‘아동보호특별법’ 제정을 준비하는 것도 미래를 위해 교육에 투자하자는 평소의 지론 때문이다. 좌우의 날개로 ‘미래’를 향해 날아가는 민병두 의원의 최종 기착지를 주목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