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수사권 독립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만 현행법상 아직까지 경찰은 검찰의 수사지휘를 받도록 돼 있다. 검찰과 경찰은 상관과 부하의 관계인 셈.
최근 이 관계가 묘하게 역전된 사건이 발생했다. 전직 경찰관이 자신을 기소한 검사를 상대로 5년 동안이나 끈질긴 ‘스토킹’을 일삼다 검찰에 붙잡힌 것.
상식 밖의 이 사건이 시작된 것은 지난 98년부터였다. 당시 조직폭력배 관련 사건을 은폐해주는 대가로 이들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검찰에 적발된 김광수씨(가명·43)가 그 주인공이다. 김씨는 이 사건으로 옷을 벗은 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수사를 담당한 A검사를 5년 동안 끈질기게 찾아다니며 협박을 일삼았다고 한다.
서울지검 강력부(이삼 부장검사)는 지난 22일 김씨를 공갈미수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에 따르면 김씨는 A검사에게 흉기와 독극물을 지니고 찾아가 협박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는 것.
A검사와 김씨가 맺어온 지난 5년간의 악연을 추적했다.
지난 97년 전북 전주에서 이 지역의 유력 조폭이던 B파 소속 일당이 시내에 있는 한 유흥주점을 습격했다. ‘우리 조직원에게 업소의 지배인 자리를 맡겨달라’는 것이 습격 이유였다.
이날 B파 조직원들이 업소를 습격한 것은 자신들의 거듭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 업소의 업주가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 이날 B파는 부두목급을 포함한 10명 안팎의 조직원들을 동원했다.
전주 시민들이 거의 알 정도로 시끄러웠던 이 사건은, 업주의 신고에도 불구하고 경찰에서 수사에 나서지도 않고 이상하게도 잠잠했다. 그러자 업주는 언론 등에 이 사실을 흘렸고, 지방신문을 비롯한 지역 언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검찰에 따르면 언론에서 이 문제가 크게 다뤄지자 경찰은 뒤늦게 수사에 착수, B파 부두목 등 모두 4명을 입건하는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건은 얼마 뒤 엉뚱한 방향으로 확대됐다. ‘조폭과 연관된 경찰이 사건을 축소했다’는 소문이 나돈 때문. 피해자인 유흥업소 주인은 “업소를 습격한 것은 4명이 아닌 10명 안팎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사건축소 의혹을 제기했다.
이 사건을 둘러싼 잡음이 가라앉지 않자 당시 전주지검 A검사는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인 김씨를 상대로 수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검찰은 이 사건을 은폐하고 조폭들로부터 9백50만원을 받은 혐의(부정처사후수뢰 혐의)로 김씨를 입건했다.
그러자 김씨는 “검찰이 조폭들의 허위진술만 믿고 나를 엮었다”며 검찰 수사에 대해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김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김씨는 이 사건으로 2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는 등 대법원에서도 유죄확정판결을 받았다. 김씨가 경찰직에서 옷을 벗은 것은 물론이었다.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은 것은 물론 경찰의 신분에서 범죄자의 신분으로 전락한 김씨는 모든 이유가 A검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지난 99년 1월께 전주지검으로 A검사를 찾아갔다. 그의 손에는 흉기와 독극물이 들려 있었다. A검사를 찾아간 김씨는 “허위조작 수사로 인해 내 인생을 망쳤으니 보상을 해주든지 법정에 가서 허위 수사를 했다고 밝혀 무죄를 받게 해달라”며 A검사를 협박했다.
김씨의 끈질긴 협박은 계속 이어졌다. 김씨는 A검사가 지난 2000년 서울지검 동부지청으로 옮긴 뒤에도 협박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같은해 11월7일 A검사 사무실을 찾아가 “사건을 조작해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으니 내가 지금까지 경찰로 근무했을 경우 받았을 월급과 연금 등을 보상하라”며 더욱 강도높은 협박을 했다는 것. 심지어 김씨는 “당신이 살고 있는 집의 위치도 다 파악해두었다”는 섬뜩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김씨의 말처럼 ‘사람 찾는 게 직업인 전직 경찰관’이었기 때문일까. 김씨의 스토킹은 A검사가 검사복을 벗고 변호사 개업을 한 뒤에도 그치지 않았다. 그는 용케 A씨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와 협박을 계속했다.
그는 지난 3월초부터는 본격적으로 A씨의 변호사 사무실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는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소송 의뢰인들이 앉는 소파에 앉아 “전주에서 올라올 때 관을 싣고 오려고 했는데 그렇게 못했다”는 등 업무를 방해할 정도로 큰 소리를 쳐댔다. 이 광경을 본 A씨의 의뢰인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김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태가 가라앉기는 커녕 점점 악화되기만 하자 결국 A씨는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검찰에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서울지검 강력부는 지난 19일 A변호사 사무실에 있던 김씨를 긴급 체포했다.
검찰은 김씨가 A검사뿐만 아니라 김씨 자신의 1심 변론을 맡은 또 다른 변호사와 재판 당시 유죄를 선고한 고등법원 부장판사실에 가서도 “죄가 되지 않는데 왜 유죄를 선고했느냐”며 따진 부분을 들어 지난 22일 김씨를 구속했다.
검사와 경찰로 만난 A씨와 김씨. 이 두 사람이 맺은 지난 5년간의 악연은 결국 한 사람은 피해자, 다른 한 사람은 피의자라는 또다른 악연을 낳고 말았다.
이번 사건의 수사를 담당한 검사는 “대법원 확정 판결까지 받은 사건에 대해 김씨가 문제를 제기하고 협박을 일삼은 것부터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