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공안사변’ 매우 쳐라!
통합진보당 해산 선고 다음 날인 12월 20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한국진보연대 주최로 열린 ‘민주수호 국민대회’에서 이정희 전 대표 등 참가자들이 ‘근조 민주주의’가 적힌 손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통합진보당 해산 선고가 내려진 다음날인 12월 20일, 경찰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된 코리아연대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했다. 22일 영장을 받아든 경찰은 코리아연대 사무실과 조직원 9명의 주거지 등 총 5곳을 압수수색했고, 일부 회원에 대한 신병 확보에 나섰다. 경찰의 다음 타깃은 민권연대(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라는 관측이 뒤따른다.
통진당 해산 소식 이후 긴급 공안대책협의회를 구성한 검찰은 이번 해산 선고로 의원직을 상실한 의원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특히 ‘강철서신’ 저자 김영환 씨가 제기한 북한 공작금 수수 의혹과 관련해 김 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이상규·김미희 두 전직 통진당 의원 사건의 수사 초점을 고소인인 두 전직 의원에 맞추는 분위기다. 26일 고소인 조사를 마친 검찰은 과거 민혁당 관련 재판 기록을 검토하며 피고소인 김 씨 주장의 사실 관계 확인에 주력하고 있다.
또한 검찰은 통진당 원내대표를 맡았던 오병윤 전 의원을 2013년 철도노조 파업 당시 노조원들에게 막대기로 출입문을 잠그라고 지시하는 등의 주도적 역할을 한 혐의로 정식 재판에 넘겼다. 1월 중 내란음모 및 선동죄로 기소된 이석기 전 의원에 대한 대법원 선고도 이뤄질 전망이다.
검경의 표적은 이미 통진당 일반 당원들에까지 넓혀진 상태다. 통진당 전체 당원은 10만 명 안팎,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만 3만 명으로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이정희 전 통진당 대표가 “보복은 저 하나로 끝내달라”며 장외투쟁에 나서고, 새정치민주연합 일각에서도 “검찰이 보수단체의 심부름꾼으로 전락했다”며 비판에 가담하고 있지만 이 같은 흐름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이다.
옛 통진당 간부급 인사는 현 상황에 관해 “수사기관에서 코리아연대, 민권연대 등을 노린다는 것은 그냥 여론몰이로 끝내지 않겠다는 뜻”이라면서 “이들 단체는 통진당 해산의 단초를 제공한 경기동부연합에서조차 혀를 내두르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민권연대는 최근 ‘종북 콘서트’ 논란에 휩싸인 황선 씨의 남편 윤기진 씨가 공동의장을 맡은 곳으로, 윤기진 씨는 지난 인천아시안게임 당시 북한 대표단을 향해 “박근혜 때문에 우리가 죄송합니다! 걱정마십시오! 통일합니다!”라고 외치기도 했던 인사다.
신년 초 공안정국 흐름은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지만, 사정당국 관계자들은 경찰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경무관급 승진 인사를 단행한 경찰 지도부가 ‘한건’을 올리기 위해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 정보계통에서 일하는 한 인사는 “청와대 문건 파동으로 정권 차원에서 경찰이 눈 밖에 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니, 만회할 각오로 뛰는 모습”이라며 “특히 부산과 경남 등지에서 정보활동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본래 부산·경남이 과거부터 민주노동당 입김이 상당히 강한 곳이었다. 이번에 승진에서 물 먹은 것도 정권 코드를 못 읽은 것 때문 아니겠느냐”고 전했다. 부산지역 경찰은 지난 12월 경무관급 승진자 명단에 한 명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국가정보원 역시 은밀히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통진당 해산은 특히 국정원에게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소식으로 여겨진다. 국정원은 박근혜 정부 첫 해부터 불법 대선개입 의혹에 휩싸여 전직 원장이 처벌받는 등 한동안 여론의 도마 위에서 난자당했다. 이듬해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증거조작이 잇따라 드러나면서 국정원식 대공수사에도 의구심이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여야 정당 및 언론사와의 개별 접촉이 원활하지 않았다.
최근 국정원은 전국 각지에 마련돼 있던 비밀전진기지(베이스캠프)를 재구축하고 다시금 활발한 정보활동에 나서고 있다는 전언이다. 상당한 수준의 첩보들이 구체화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최근 여의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몇 가지 간첩단 시나리오가 나도는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활동 중인 한 야권 인사는 “국정원에서 통진당 출신 인사들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진보 교육감 사이의 커넥션에 집중하고 있다고 들었다”며 “조만간 ○○○ 간첩단 사건이 터져 대대적으로 보도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전했다.
청와대 역시 ‘조용한 공조자’로 참여하고 있다. 통진당 해산 소식이 알려진 직후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 하락세가 멈췄고, 일부 여론조사에서 반등하는 양상을 보이자 내심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통진당 해산 선고를 두고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변호사 출신의 한 새정치연합 의원은 “대통령이 직접 공안정국에 대한 지침을 내리는 분위기 아니냐. 각 기관이 헌재 결정문을 인용하면서 손 놓고 있던 사건을 다잡는 경향이 나올 것”이라며 “청와대 인사 파동과 정윤회 문건 등으로 위기에 몰렸던 김기춘 비서실장이 새해에도 살아남으려는 것 같기도 하다. (김 실장이) 유신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고 하잖나. 막걸리 보안법이 다시 나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며 씁쓸해 했다.
일각에선 정권 차원의 ‘종북 몰이’가 길어질 경우 자칫 역풍이 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년부터 여야 이념 대결이 격해지고 대치 국면으로 치달을 경우, 산적한 현안이 밀리면서 정권 누수현상이 빨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여권 일각에서는 “지난 총선 야권연대 역시 북한 지령에 따른 것”이라며 ‘드센 공격’에 나서는 중이다. 한 친박계 재선 의원은 “공안정국은 속도감 있게 진행해 끝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정부·여당에서 추진하는 규제개혁 및 경제활성화 등 중요한 사안이 한없이 밀리게 되면 결국 국정운영에 부담이 된다”고 지적했다.
시사평론가 소종섭 전 <시사저널> 편집국장 역시 “정부·여당 입장에서 레임덕 분위기를 반전시켰다는 데 의미가 있다”면서도 “공안정국을 만드는 것 자체가 정권 3년차 핵심 의제가 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통진당 해산 관련 사안과 거리를 두며 국정운영 중심 의제에서 멀리 떨어뜨릴 필요가 있다. 안에서는 지난해 정윤회 문건으로 촉발된 비선조직 문제, 즉 청와대 인적쇄신을 비롯해 공무원 조직 정상화에까지 초점을 맞춰 흐름을 전환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