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도외시하면 완생도 죽어”
한때 바둑 프로기사를 꿈꿨던 김기선 의원은 아마 7단 기력을 보유한 국회 내 최고수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바둑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5학년 때쯤 선친이 두시는 걸 어깨 너머로 보며 배웠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 (선친을) 이겼다.”
―신동이다.
“아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부친 기력이 18급 정도 되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이기고 나니까 바둑이 재미있어졌다. 그 후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따로 배운 적은 없는지.
“그렇다. 중학교에 입학, 바둑부에 들어가 1주일에 한 번 정도 대국한 게 전부다. 또 바둑 책을 사서 독학으로 공부했다. 소설보다 재미있더라. 내 기질과 잘 맞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하다 보니 고등학교 입학 무렵 어느새 1급이 돼 있었다.”
―프로기사를 꿈꿨었다고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선친의 사업 실패로 형편이 어려워졌다. 집안 사정 때문에 대학에 못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당시 프로기사가 되면 한 달에 기사 수당 3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그래서 프로기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기원에 나가기 시작했다.”
―왜 접었나.
“당시는 독학으로 프로가 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엔 스스로 한계가 있었다. 또 바둑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결국은 프로기사도 못 되고, 바둑 두느라 공부를 소홀히 해 대학도 늦게 갔다(웃음). 그 후론 취미로 뒀다. 그래도 대학교 때 대학바둑선수권대회에 출전해서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김 의원은 1952년생으로 1953년생인 조훈현·서봉수 9단과 연배가 비슷하다.
“조훈현 9단은 어릴 때부터 천재로 유명했다. 결국 일본에 가서 바둑을 공부했다. 서봉수 9단과는 추억이 있다. 고교 시절 동양3국(한국·대만·일본)바둑대회 대표선발전에 출전했는데 나는 떨어졌고, 서 9단이 우승했다.”
―대학 졸업 후 당직자로서 정치에 입문했는데.
“1981년 민정당 사무처 공채2기다. 행정고시 1차에 합격한 뒤 2차를 준비하던 때였다. 친구 추천으로 응시하게 됐는데, 정당이 어떤 곳인지 호기심이 있었다. 혹시 몰라서 행정고시 공부는 계속했다. 면접 때도 소신에 맞지 않으면 합격해도 그만둔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붙었다. 그리고 2004년까지 23년간 당직자 생활을 했다.”
―당에 오랫동안 몸담으면서 느꼈던 소회는.
“1980~1990년대의 정치적 격변기에 정당인으로서 고비를 헤쳐 나갔던 것은 소중한 경험이다. 2004년 당직자로선 처음으로 자치단체 정무부시장(강원도)에 임명된 것도 이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자평한다. 반면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함께했던 이들이 개인적 비리로 옥살이를 하는 모습을 봤을 땐 자괴감도 많이 들었다.”
―다시 바둑 얘기 좀 해보자. 혹시 드라마 <미생>은 봤는지.
“집사람이 열혈 시청자였다. 그래서 가끔 지나가면서 봤다. 바둑에서 미생마란 살아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죽은 돌도 아니다. 바둑을 둘 때 미생이 죽지 않도록 항상 신경을 써야 한다. 또 이를 위해선 때로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 드라마에 보면 정규직 문제 등이 나오는데 바둑에서 의미하는 미생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의정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둑의 오묘한 점 중 하나가 완생이라고 해서 다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돌발 변수가 발생하면 완생도 죽을 수 있다. 현실에서 보면 IMF 외환위기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바둑용어 대마불사(大馬不死·큰 돌은 죽지 않는다)를 외쳤던 재벌들이 해체되리라고 누가 예상했느냐. 어떻게 보면 완생이라고 할 수 있는 국회가 미생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미생을 도외시하면 완생도 죽는다.”
김기선 의원은 인터뷰 말미에 부득탐승(不得貪勝·승리를 탐내면 이기지 못한다)이라는 바둑용어를 소개했다. 김 의원이 바둑을 통해 깨달은 인생의 교훈이란다. 부득탐승은 ‘돌부처’ 이창호 9단이 지난 2011년 펴낸 에세이집 제목이기도 하다. 바둑이 승리를 위한 경기이긴 하지만 여기에 집착하다 보면 오히려 실수하게 된다는 얘기다.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도 상대를 이기려 하지 않았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차분하게 상황을 바라볼 뿐이다. 김 의원은 이렇게 강조했다.
“개인적인 탐욕을 갖게 되면 언행에 문제가 생기고 나중에 반드시 화를 입게 된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