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마누라 죽이기>의 한 장면. | ||
경북 구미경찰서는 자신을 간통 혐의로 고소하고 재산을 가압류한 전 부인에게 앙심을 품고 살해를 기도한 혐의(살인예비 음모)로 장지철씨(가명·50)를 지난 14일 구속했다.
금지된 사랑과 조폭의 살인음모가 맞물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이번 사건을 취재했다.
지난 93년 여름 경북 구미시, 찌는 듯한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N운수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장지철씨는 쉬지 않고 부채질을 해보지만 흐르는 땀은 식을 줄 몰랐다.
신경질적으로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을 때, 문득 길 건너편 약국에 낯선 아가씨가 눈에 띄었다. 당시 28세 처녀였던 그녀의 모습은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장씨의 마음을 흔들었다.
“예쁜 아가씨가 새로 오셨나 보네.” 약국을 찾아 피로회복제 한 병을 사 든 장씨는 짐짓 수작을 걸어봤다. 그런 장씨에게 막 약국에 취직한 이연숙씨(가명·38)는 살짝 수줍은 미소를 비쳤다.
평생 어디 한 군데 앓던 곳 없던 ‘강골’ 장씨는 이때부터 시도때도 없이 머리가 아팠고 배탈이 났고, 손목을 삐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시로 얼굴을 마주치던 두 남녀는 급기야 눈이 맞았다.
당시 장씨는 부인뿐만 아니라 두 아들까지 둔 어엿한 유부남이었지만 이씨와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그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장씨는 첫 번째 부인과 헤어지고 약국 처녀 이씨와 재혼했다. 이후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지난 95년 장씨는 운수회사를 접고 구미시에 객실 30여 개 규모의 여관을 세웠다.
그런 장씨의 부부생활은 부인 이씨의 남동생이 결혼하면서 다시 위기를 맞았다. 지난 2000년 무렵 장씨가 처남댁과 금지된 사랑에 빠지고 만 것. 그러나 이 소문은 바람처럼 빨랐다. 급기야 부인 이씨와 그녀의 남동생의 귀에도 이 소식이 들어갔다.
부인 이씨도 남편에 대한 ‘응징’에 돌입했다. 일단 남편의 가장 큰 재산이었던 여관을 가압류했다. 이씨 입장에서는 여관을 짓던 지난 95년 당시 자신도 일정 금액을 투자했고, 자신과 결혼생활을 하면서 취득한 재산이기 때문에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장씨는 1심 재판에서 패한 뒤 부인 이씨에게 1천5백만원을 건네주는 조건으로 합의에 성공했다. 이 덕분에 장씨는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
‘금지된 사랑’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른 장씨는 출감 직후 처남댁과 눈물의 재회에 성공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든 아픔을 딛고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못했다. 장씨 명의이던 여관을 전 부인 이씨가 가압류 해놓은 탓에 경제적 어려움이 따른 것.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정봉석씨(가명·22). 정씨는 장씨가 수감됐을 당시 같은 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동료 재소자였다. 두 사람은 출소 이후 자주 만나던 중 장씨가 정씨에게 “전 부인이 고소해 징역을 살았고, 지금은 여관을 가압류해 형편이 어렵다”며 살해 의도를 비쳤다.
살인 음모는 지난 2002년 3월쯤 처음 계획됐고, 같은 해 7월 장씨의 승용차 안에서 완성됐다. 승용차 안에서 장씨는 “전 부인이 차에서 내려 아파트로 들어갈 즈음 전기 충격기로 지진 뒤 마대자루에 넣어 공원으로 데려오기만 하면 나머지 일은 전부 내가 처리하겠다”며 정씨에게 사주했다.
약 20분간 이어진 대화에서 장씨는 전 부인의 집주소와 차량 번호를 알려줬고, 납치 방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지시했다.
장씨와 정씨가 불화를 빚던 2002년 12월쯤 상황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장씨가 전 부인 이씨와 가압류 문제에 합의하게 된 것. 일단 가압류를 풀어놓은 뒤 여관을 매각해 그 대금의 일부를 이씨에게 위자료로 지급한다는 조건이었다.
장씨는 이 합의로 모든 문제가 끝난 줄로만 알았고 이씨를 살해하려 했던 사실조차 잊고 지냈다.
그러나 정씨와 꾸몄던 ‘작전’은 훗날 그를 옭아매고 말았다. 정씨가 2002년 7월 장씨와 전 부인 이씨에 대한 살해를 공모할 때 나눴던 20분 가량의 대화를 그대로 녹음해 두었던 것. 이 녹음테이프는 9개월 뒤인 지난 4월 초 등장했다.
장씨의 부인 이씨에 대한 살해 계획이 무산된 뒤 장씨와 서먹해진 정씨는 생활이 어려워지자 ‘이 녹음테이프만 활용하면 큰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란 말로 자신의 친구 허성수씨(가명·23)를 꾀었다. 허씨는 폭력조직 P파의 행동대원. 그 역시 ‘큰 건 한탕하자’는 정씨의 계획에 흔쾌히 동의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녹음기를 챙겨든 채 지난 2일 경북 구미시 한 커피숍에서 장씨의 전 부인 이씨를 불러냈다. 살인청부업자라도 된 양 의기양양하게 이씨에게 접근한 두 사람은 이씨에게 녹음 내용을 들려줬다.
묵묵히 전 남편의 녹음된 음성을 듣고 있던 이씨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진 것은 당연했다. 테이프가 다 돌아간 뒤에도 이씨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의 침묵. 정씨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장아무개는 사모님을 살해하라고 했지만 지금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돈이니 빠른 시일 내에 연락주십시오.”
잔뜩 조폭 행세를 한 두 사람은 이런 내용의 협박을 남긴 채 유유히 커피숍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일주일 뒤 그들을 찾아온 것은 이씨가 아닌 경찰이었다. 이씨가 이 모든 사실을 경찰에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했던 것.
경찰은 이들 두 명을 공갈미수 혐의로 구속하는 한편 애초에 살인을 사주했던 남편 장씨에게 대해서는 살인예비 혐의를 적용해 역시 구속했다.
경찰관계자는 “비록 남편 장씨가 지금은 살해할 계획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지난해 범행모의 당시 범행에 쓰일 전기충격기와 마대자루를 직접 구입해 정씨에게 넘겨주는 등 살인의 의도가 명백했던 만큼 살인예비 음모를 적용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