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 70대 노모가 아들의 행패를 견디다 못해 소송을 제기, 결국 모자간의 인연을 끊었다. 비록 입양아였으나 채 돌도 지나지 않은 무렵부터 30년 이상을 키워온 유일한 아들이라는 점에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서울가정법원 가사6단독 신동훈 판사는 지난 2일 정경숙씨(가명·71)가 양아들 최영민씨(가명·33)를 상대로 낸 ‘친생자관계 부존재확인’ 소송에서 “친생자 관계가 존재하지 않음이 명백하고, 두 사람 사이는 이미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탄에 이르렀다”며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지난 30여 년간 이어온 부모·자식간의 애틋한 관계가 일순간 ‘남남’으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이 기구한 인연의 시작은 늦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70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정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정씨는 이웃집 대문 앞에 버려진 사내아이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잉꼬부부’로 불리며 남부럽지 않은 결혼생활을 이어왔지만 아직 자식이 없다는 것이 늘 마음 한구석에 허전함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 더구나 몇 해 전 유산 후유증으로 인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정씨에게 채 돌도 지나지 않은 이 아이는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로 여겨질 정도였다.
정씨 부부는 바로 이 아이를 둘 사이에서 태어난 친생자로 출생 신고했다. 사실을 알고 있는 주변에도 입조심을 시킨 것은 물론이다. 정씨와 아들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어린 시절의 영민군은 평범한 아들이었다. 또래 아이들이 겪는 잔병치레 한 번 없이 튼튼하게 자랐고, 정씨 부부의 유일한 희망으로 커갔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86년 남편 최씨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하나둘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전쟁중 혈혈단신으로 피란 내려와 서울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최씨는 이들 가족에게는 듬직한 기둥이나 다름없었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타지에서 최씨는 오직 아내와 아들을 돌보는 일에 온 정성을 쏟았다.
남편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졌지만 당장 먹고살 걱정에 정씨는 장사에 뛰어들었다. 그나마 아들 영민군이 있어 희망을 갖고 살았다. 하지만 믿거나 했던 아들은 오히려 정씨에게 고통을 안겨주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에서였을까. 고등학생이 된 아들은 급격히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사춘기 시절 누구나 겪는 일시적인 방황이겠거니 하고 여겼지만 외박과 가출이 하루 이틀 늘어났고, 급기야 불량스런 친구들과 어울리며 학교수업을 빼먹기가 예사였다.
어려운 형편이지만 용돈도 넉넉하게 쥐어 주고, 교회도 열심히 데리고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갈수록 난폭함마저 늘었다.
정씨의 고통은 아들이 성인이 되면서 더욱 심해졌다. 아들은 22세 되던 해 갑자기 동갑내기 한 여성을 집으로 데려왔다. 같이 살 여자라고 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정씨는 ‘그래도 가정을 가지면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기대로 받아들였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정씨는 아들 부부에게 조그마한 가게를 만들어주고 차도 사줬다. 더도 덜도 말고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아들의 동거생활은 채 2년을 넘기지 못했다.
주변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에 바쁜 아들은 그나마 정씨가 힘들게 마련해준 재산마저 모두 탕진한 채 또 돈을 요구해 왔다.
이후 아들은 또 한 명의 새로운 여성을 데리고 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이번 역시 정씨는 전세를 얻어주었다. 하지만 아들의 방탕한 생활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다.
계속되는 돈 요구에 당시 별다른 수입이 없던 정씨가 도움을 줄 수 없게 되자 집안에 있는 가구를 부수는 등 행패를 부리는가 하면 지갑을 몰래 훔쳐가기도 했다. 견디다 못한 정씨는 결국 이민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아들과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정씨는 형제들이 살고 있는 캐나다로 97년 이민을 떠났다.
이민을 떠나면서도 정씨는 공항에서 아들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마음을 잡고 잘 살아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정씨의 캐나다 생활도 여의치 못했다. 낯선 외국생활에 적응을 못한 것. 결국 이듬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정씨에게 또다시 아들의 소식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방탕한 생활로 인해 아들의 가정은 다시 한 번 풍비박산나 있었던 것. 이혼한 채 세 번째 며느리는 집을 나갔고 손자는 아예 고아원에 버려져 있었다. 그리고 아들은 또 다른 여자와 동거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정씨는 힘든 결정을 내렸다. 어긋나기 시작한 아들과의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기 위해 법원에 친생자관계 부존재확인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럴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에 정씨는 법원을 다녀올 때마다 며칠씩 앓아누웠다. 그리고 마침내 법원은 정씨의 딱한 사정에 손을 들어 주었다. 국내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부모와 자식과의 인연을 끊는 법적인 절차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안성모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