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통화한 내용에 대해서….”
흠칫 놀란 김 비서관은 중간에 말을 끊었다.
“무슨 전화 통화요. 사령관님에게 연락드린 적이 없는데요.”
순간 송 사령관은 직감했다.
‘완벽히 속았군.’
당시 송 사령관은 6월 불시 보안 검열에서 군사 기밀 누출 혐의로 적발된 권아무개 중령을 잘 봐달라는 김 비서관의 두 차례 전화를 받고 고민중이었다.
보통 사건이 아니다 싶어 ‘전후좌우’를 살펴보던 송 사령관에게 어느날 다시 김 비서관이라고 신원을 밝힌 여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송 사령관은 “당신 누구냐”고 호통을 쳤다. 바로 전화는 끊어졌다.
이 해프닝은 지난 12월2일 언론에 공개된 모 기무부대 소속 권 중령의 사기 피해 사건 전모가 밝혀지는 계기가 됐다.
대령 진급에 목을 매던 권 중령이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대기업 회장의 수양딸과 김 비서관을 사칭한 K여인의 농락에 빠져 수억원대 돈과 군 기밀을 누설하는 바람에 결국 중징계를 당했다.
이 사건의 수사를 맡은 경찰청 특수수사과 조사에 의하면 사건은 지난 2001년으로 돌아간다. 충북 모 기무부대 안전과장으로 근무하던 권 중령이 K여인을 알게 된 것은 그 해 9월경.
권 중령은 전부터 알고 지내던 K씨 오빠의 소개로 그녀가 운영하던 충북 괴산 소재 보신탕집을 찾았다. 음식은 물론 K씨의 나긋한 성격에 끌린 권 중령은 식당에 자주 발걸음을 했다. 어느새 둘은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는 사이로 발전했다. K씨는 당시 군청에 다니는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다.
그즈음 권 중령의 가장 큰 고민은 진급문제였다. 육군 3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지난 95년 중령으로 진급 한 그는 대령 진급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육사 출신이 아니고, 전투부대 근무 경력 또한 없다는 점 때문에 늘 불안해 하던 터였다.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령 계급장을 달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녀는 이 점을 노리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음식점을 하다 수천만원 이상의 빚을 지고 있었다. 그녀는 급기야 권 중령에게 자신을 청와대측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P그룹 C회장의 수양딸이라고 속이면서 본격적인 ‘작업’에 나섰다. 그녀는 “아버지께 당신의 진급을 부탁하겠다”며 권 중령을 자극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의외로 서두르지 않았다. K씨는 “아버지(회장) 집에 가서 당신 이야기를 했다”라고 속이는 한편 수 개월동안 PC방에서 C회장 명의로 권 중령에게 메일을 보내 기도 했다. 메일에는 “나 왕회장이야. 권 과장. 자네 이야기 희엄마(K씨를 지칭)로부터 잘 들었으니, 좋은 소식 기다리게” 또는 “청와대 다녀왔네. 자네 진급 문제를 대통령께 보고 했으니 걱정 말게나” 등의 내용을 적어 보냈다.
결국 대령 진급에 목말라했던 권 중령은 K씨의 ‘계략’에 빠져 ‘간’과 ‘쓸개’를 빼주기 시작했다. K씨는 “왕회장(C회장)은 곧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러면 부동산, 주식 등을 물려받을 것이다”면서 ‘가속’을 붙였다.
이에 권 중령은 올해 3월부터 6월까지 30차례에 걸쳐 3억1천7백여 만원을 K씨에게 송금했다. 그 중 3분의 1은 진급 청탁을 위해 왕회장과 군 장성 로비로, 나머지는 P기업의 주식을 원가로 사서 차익을 남겨 주겠다는 K씨의 말에 속아 보낸 것이다. 이 돈으로 K씨는 빚을 갚고 일부는 유흥비로 탕진했다.
K씨는 권 중령이 혹시라도 의심을 할까봐 “청와대에서 군 내부 여론을 받으려 한다”며 군 비리 정보를 권 중령으로부터 받아냈으며 북악산과 태극기 문양을 새긴 한 냥짜리 순금열쇠를 청와대 하사품이라며 선물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