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지 않고 채우기만…곰팡이 피겠네
2012년 7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민간단체인 ‘통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통일생각)’이 주관하는 통일기금 모금운동에 동참, 통일항아리에 금일봉을 기부하고 있다. 이 당시 남북협력기금 불용률은 최고치인 92%를 기록했다. 연합뉴스
남북협력기금은 지난 1990년 남북 간의 상호교류와 협력을 지원한다는 명목 하에 조성된 공적 기금이다. 해당 기금은 설치법령에 따라 △남북 왕래에 필요한 비용 △문화 협력 사업에 필요한 자금 △교역 및 경제 분야 협력사업 지원 △인도적 지원 등에 쓰인다. 사실상 통일을 준비하는 곳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온 셈이다.
최재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실에서 제공한 2014년 통일부 국감 정책자료집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부터 박근혜 정부 1년차인 2013년까지 누적된 남북협력기금 불용액은 5조 7940억 원 정도로 집계됐다.
전체 기금액에 대한 불용액의 비율을 나타내는 불용률로 따져보면 좀 더 이해가 쉽다.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해였던 2007년, 기금의 불용률은 17.4%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기금의 불용률은 78.4%로 급증했다. 2009년 86.8%의 불용률을 기록한 기금은 5·24 조치가 있었던 2010년 89.7%로 증가한다. 2011년 급기야 불용률 90%를 넘기는 한편, 정부 마지막 해에는 최고치인 불용률 92%를 기록했다.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 남북협력기금이 꽁꽁 묶인 셈이다.
6년간 불용액 5조 7940억 원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부분은 ‘인도적 지원’ 예산이다. 3조 8904억 원으로 전체 불용액의 67%를 차지한다. 일반적인 교류 사업은 둘째 치고 정치적 상황과 비교적 관계없는 순수 인도적 지원 부분도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 1년차인 2013년도 기금의 불용률은 72.3%로 다소 호전된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이는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와 비교한다면, 여전히 큰 수치다. 더군다나 인도적 지원 사업 분야의 불용률은 97.7%로 나타났다. 2013년도 인도적 지원 사업 분야 예산액 7400억 원 중 집행한 예산은 173억 원 수준이다. 최재천 의원실 관계자는 “박근혜 대통령은 정부 출범 이후 수차례에 걸쳐 대북 인도적 지원에 대해선 개선 의지를 밝혔다지만 실제 개선된 것은 미비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명박 정부 이후 꽁꽁 묶인 기금과 교류협력으로 인해 직격탄을 맞은 곳은 민간단체들이다. 협력기금의 지원을 토대로 대북 지원 사업을 해온 민간단체 상당수는 지금까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일부 단체는 사라지기까지 했다. 한 민간단체 관계자는 <일요신문>과 만나 “당장 기금이 지원되고 방북길이 열려도 회복되기 쉽지 않다. 이전 북측과 계약된 사업들은 사실상 무용지물”이라며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묶여 있는 돈은 중앙 정부의 남북협력기금만이 아니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 역시 자체 조례를 제정해 많게는 수백억 원 규모의 기금을 마련한 상태다. 5·24 조치 이후 해당 기금들 역시 정부의 사업 불허 탓에 묶여 있는 상황이다. 이를 합친다면 불용액 규모는 더욱 늘어나는 셈이다.
실제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8일 기자단 오찬에서 “서울시에만 남북교류협력사업기금이 150억 원이나 쌓여있다. 사업을 못하고 있다 보니 매년 이자가 늘고 있다”며 “중국이나 베트남의 사례처럼 남북이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등 문화사업을 확대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지원 분야까지 밝히며 정부를 압박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일 청와대에서 통일준비위원회 제3차 회의 참석자들과의 오찬에 참석한 모습. 사진제공=청와대
그런데 최근 남북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보임에 따라 꽁꽁 묶였던 ‘곳간’이 풀릴지 기대감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눈여겨 볼 부분은 남북교류에 있어서 가장 큰 족쇄로 자리 잡고 있는 5·24 조치에 대한 여권 내부의 반응이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박근혜 정부도 앞서 이명박 정부 5년의 대북 폐쇄 정책이 사실상 실패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런 득도 없고 도리어 위험하다는 사실도 안다. 올해를 기점으로 5·24 조치에 대한 변화는 어떤 식으로든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정부도 이에 대해선 이해하고 있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다만 야권에서 주장하고 있는 전면 해제는 아니다. 단계적, 부분적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이 관계자는 이에 따른 남북협력기금 개방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답했다.
“야권에서 기금의 불용 규모를 두고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긴 하다. 이명박 대통령의 ‘통일항아리’까진 아니더라도, 급변사태에 대비한 예비자금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인도적 지원을 포함해 꼭 필요한 곳에는 써야 한다고 본다. 무작정 기금을 방치하자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마도 5·24 조치 변화에 따라 기금도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다.”
실제 지난 연말 통일부는 한 민간단체의 인도적 대북 식량지원을 승인한 것으로 확인됐다. 품목은 고구마 20톤으로 5200만 원에 해당하는 소규모다. 박근혜 정부 들어 생곡물을 대북지원 품목으로 승인한 것은 최초의 일이다. 그동안 정부는 영유아에 전달될 가능성이 비교적 높은 가공식품 외에 생곡물은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사실상 지원을 금지해 왔다. 의미 있는 변화인 셈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