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안갚으려 세 자녀까지…무서운 이웃
어린 세 자녀 등 일가족 4명이 목숨을 잃은 방화사건의 범인은 피해자의 ‘친한 언니’인 이 아무개 씨였다. 작은 사진은 불에 탄 집의 내·외부 모습으로 MBC뉴스 화면 캡처.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29일 저녁 9시 30분께 강원도 양양 현남면에 위치한 한 가정집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119 구조대는 신고를 받은 즉시 현장에 도착했지만 불이 난 집에 있던 박 아무개 씨(여·38)와 첫째 아들(13), 딸(9), 막내아들(6)은 이미 사망한 후였다. 초반 경찰은 동네 주민들이 폭발음과 함께 불이 났다는 진술을 토대로 단순 주택 화재로 추정했다. 일각에서는 남편과 별거 중인 박 씨가 신변을 비관해 어린 세 자녀와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 아니겠냐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데 단순 주택화재로 볼 수 없는 정황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박 씨를 비롯한 세 자녀는 대피나 탈출을 하려했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화재로 사망한 시신 대부분이 탈출을 시도하다 출입문 쪽에서 발견되는 경우와 달리 박 씨와 딸은 작은방에서, 큰 아들은 소파 위, 작은 아들은 작은방 입구에서 발견됐다.
화재의 원인은 점점 방화 쪽으로 기울었다. 시신이 천장을 보고 편안한 자세로 누워있는 것도 단순 화재가 아닌 방화를 의심케 했다. 현장에서 처음부터 석유냄새가 진동한 것도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결정적으로 숨진 박 씨와 세 자녀들의 몸에서 수면유도제 성분이 발견됐다. 또한 박 씨의 마지막 동선은 처음 발화지점으로 추정되는 거실을 피해 작은방으로 피신한 것으로 파악됐다. 만약 박 씨가 세 자녀와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할 심산이었다면 수면제를 먹고 몸을 피신할 이유는 없었다. 늦은 시각 인적이 드문 동네임에도 누군가 마지막으로 빠져나간 듯 현관문이 잠겨 있지 않은 것도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더했다.
단순 주택화재가 아님을 인지한 경찰은 박 씨 주변인물을 상대로 탐문을 시작했다. 그런데 유독 한 여성이 눈에 띄었다. 박 씨 집에 화재가 발생했던 날 119 소방차량이 출동하자 가장 먼저 뒤따라와 진화 상황을 지켜봤던 이웃집 여성 이 아무개 씨(여·41)였다.
3년 전 학부모 모임을 통해 알게 된 박 씨와 이 씨는 ‘친한 언니 동생’ 사이로 지내며 친분을 쌓아갔다. 지난 2013년 9월 이 씨는 박 씨에게 1800만 원을 빌렸으나 이를 약속한 날짜에 제때 갚지 못하면서 둘의 사이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속초경찰서 수사팀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화재당일에도 이 씨는 묻기도 전에 적극적으로 목격담을 얘기하며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며 “이후 이 씨는 박 씨가 남편과 사이가 나빠 별거 중이며 우울증이 있었다고 진술하는 등 동네 주민 중 유일하게 박 씨의 자살 가능성을 언급했다. 박 씨가 휘발유를 구입하는 것을 봤다거나 화재현장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박 씨의 옷이 일부 벗겨져 있었으니 또 다른 범죄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며 동네 주민들에게 언급한 것도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 씨는 자신을 박 씨와 ‘친한 언니’라고 소개했지만 화재 이후 이 씨가 보여준 행동은 ‘친한 언니’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미심쩍어 보였다. 이 씨는 슬픔에 잠겨있는 박 씨의 유족에게 박 씨가 자신에게 빌려간 돈이라며 차용증을 건네기도 했다. 또, 이 씨는 사망한 박 씨가 자신의 아들을 함부로 대했다며 주변사람들에게 험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속초경찰서 관계자는 “이 씨가 박 씨 유족에게 건넨 차용증은 이 씨가 위조한 것”이라며 “이 씨는 진술을 할 때마다 매번 내용이 바뀌었는데 이를 지적하면 갑자기 몸이 아프다며 참고인 진술을 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한번은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이 없었다. 그러나 이 씨가 방화 용의자라는 결정적인 단서가 발견되면서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화재당일 박 씨를 본 적이 없다고 했던 이 씨의 집으로 박 씨의 차량이 왔다간 것이 인근 CCTV에 포착된 것이다. 이 씨가 2013년부터 12회에 걸쳐 박 씨와 박 씨 세 자녀의 몸에서 발견된 성분과 같은 수면제를 280정 구입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 씨를 용의자로 특정한 경찰은 지난 8일 자신의 병원 치료차 서울 강남의 한 병원에 들른 이 씨를 구속했다.
이 씨와 박 씨가 거주했던 양양 현남면 모 마을회관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처음에는 “불이 났었다”면서도 이 씨와 박 씨에 관계에 대해 묻자 “여기는 불난 데도 죽은 사람도 없다”며 대답을 바꾸며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동네 주민들은 평화로운 마을에서 졸지에 4명이나 사망한 방화사건에 대해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언론 접촉도 극도로 피하고 있다.
속초경찰서 관계자는 “이 씨가 박 씨의 별거중인 남편이 집에 들렀다 돌아가는 날을 골라 범행을 저질렀고 오랜 기간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며 “또한 이 씨는 경찰은 물론 주민들에게까지 거짓말을 하며 수사에 혼선을 줘 죄질이 무겁다”고 지적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