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기관이 거액의 자금을 일반인의 명의를 도용해 계좌를 개설, 1년동안 몰래 관리해온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예상된다. 이 같은 사실은 세칭 ‘안풍’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검찰이 안기부 계좌를 추적하다 우연히 밝혀낸 것으로 알려졌다. 안풍사건은 지난 96년 총선 당시 안기부 자금을 선거자금으로 전용한 사건.
검찰 수사 결과 안기부는 여러 개의 금융계좌를 만들어 차명으로 자금을 관리했다는 것. 검찰은 이 차명계좌들을 추적하는 과정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일반인의 이름이 등장함에 따라 안기부가 일반인의 계좌까지 도용해 자금을 관리해온 사실을 밝혀냈다.
명의를 도용당한 사람은 현재 서울 중구 신당동에 거주하는 장아무개씨(여·48). 평범한 가정주부인 장씨는 자신의 명의가 안기부에 의해 도용당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검찰에 따르면 안기부는 지난 95년 10월부터 96년 10월까지 1년간 안기부 예산 명목으로 발행된 국고수표 3백61억원을 15차례에 걸쳐 서울은행 충무로1가점(현 하나은행 명동지점)에 장씨 명의의 계좌를 개설해 관리했다.
장씨가 이 사실을 안 것은 최근 안풍사건에 대한 조사를 받고 있는 강삼재 전 의원의 변호사로부터 연락을 받으면서. 강 전 의원의 변호사인 장기욱 변호사는 “검찰 수사자료를 확인한 결과 95년 10월부터 96년 10월까지 안기부가 자금을 장씨 명의의 계좌로 관리해온 사실을 알게 돼 본인에게 알려주었다”고 전했다.
장기욱 변호인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장씨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언론사 기자 등의 전화가 쇄도하는 바람에 장씨는 크게 당황했다.
▲ 안기부는 ‘일신문예진흥회’ ‘국제홍보문화사’ 등의 유령회사를 세운 뒤 이들 회사 명의로 은행계좌를 만들어 자금을 관리했다. 사진은 거래내역 일부. | ||
장씨 명의의 계좌가 본인도 모르게 개설된 것에 대해 그는 “은행이 그렇게 남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했다니 말이 안된다. 변호인과 기자들이 나서서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입증해 달라. 그것을 바탕으로 은행측에 소송이라도 걸어야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양씨는 현재 중소 무역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아내 장씨는 서류상의 감사로 등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전업주부였다.
실제로 강 전 의원의 변호인인 장기욱 변호사는 “장씨의 주변 친지들을 조사해본 결과 장씨 언니의 남편이 당시 서울은행 충무로1가점의 지점장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변호인단의 추정에 따르면 안기부가 당시 지점장에게 차명계좌를 부탁했을 수 있고 지점장은 자신의 처제 명의로 차명계좌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왜 안기부의 자금이 안기부와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 명의의 계좌에서 관리된 것일까.
변호인측에 따르면 “이것은 안기부 자금이 불법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보고 있다. 변호인 측에 따르면 모든 국가기관은 중앙부처와 한국은행의 통보를 받아 구체적 집행요인이 있을 때 국고수표를 발행해 사용하게 되어 있는데, 안기부는 매월 1일 한꺼번에 전액을 국고수표로 발행해 한국은행에서 자금을 탄 후 안기부가 관리하는 차명계좌에 입금해 왔다.
특히 예산회계법령상 국가기관은 계좌를 만들어 자금을 개별적으로 관리하지 못하게 되어 있음에도 불법적으로 차명계좌를 만들어 관리해 왔다는 것.
장기욱 변호사는 “이런 식으로 조성된 불법자금들이 YS의 비자금으로 쓰였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특수업무를 담당하는 안기부의 특성상 자금사용처 등과 관련해 지출내역 항목을 구체적으로 표시하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일반인의 명의까지 도용해 자금을 별도로 관리하는 것은 불법 자금이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정보기관의 불법으로 정신적 피해를 본 국민들의 고통은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