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4년 부유층을 대상으로 엽기적 살인 행각을 벌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사건의 현장검증 모습. 피의자 사씨 등은 이들을 동경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 ||
주범 격인 사아무개씨(34)는 지난 5월 말 인터넷 D포탈사이트에 ‘폼나게 한탕’이라는 카페를 개설하고 범행에 가담할 공범을 모집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후 사씨는 이를 보고 찾아온 이아무개씨(22·탈영병), 또 다른 이아무개씨(23·음식점 배달원), 고아무개씨(22·무직) 등과 함께 강도, 절도 및 퍽치기 등의 범행을 저질러 왔다. 이들 4인조는 지난달 20일 대전 둔산경찰서에 특수강도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이들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닥치는 대로 범행을 일삼았던 것은 본격적인 한탕의 ‘거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4인조는 잡범에 머물렀고 이들이 꿈꿨던 ‘폼나게 한탕’ 역시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씨는 “사는 것도 힘들고 잘 사는 사람만 대우 받는 현실이 싫어 한탕하려 했다”며 “지존파처럼 되는 게 목표였다”고 진술한 것으로 경찰은 전했다. 실제로 사씨는 부자들만 사는 아파트를 골라 1층부터 최고층까지 아파트 전체를 털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주범’ 사씨는 지난 5월8일 ○○교도소에서 사기죄로 8년간 복역하고 출소한 인물.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온 사씨는 일자리를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오랜 ‘공백’에 특별한 기술도 없는 그가 직장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게다가 전과자에 대한 사회의 냉대도 그를 괴롭혔다. 당장에 생계를 이어가기도 어려웠을 정도였다. 사씨는 경찰 조사에서 “교도소에 있을 땐 최소한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출소하고 나니 모든 게 막막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출소한 지 한 달도 안돼 다시 범죄의 유혹에 빠져들고 말았다. 지난 5월31일 한 인터넷 사이트에 ‘폼나게 한탕’이라는 카페를 만들었다. 회원 수 10명인 이 카페는 회원들이 범죄정보를 공유하고 같이 ‘한탕’할 공범들을 모집하는 공간이었다.
이 카페의 회원들은 괜찮은 ‘아이템’(범행계획)을 게시판에 올려놓고 서로의 범행수법을 비교하면서 ‘한탕’을 준비했다. 사씨는 카페를 비공개로 운영해 일반인과 경찰의 접근을 차단하기도 했다.
카페 회원들은 게시판에 간단한 자기소개와 자신들이 생각하는 범행수법, 연락처 등을 남겨놓고 이메일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다. 회원 모두는 수사기관에 발각될 것에 대비해 타인 명의로 가입했거나 주민등록번호 생성기를 이용해 가짜 주민번호로 가입돼 있었다.
카페 개설 직후 먼저 노크를 해온 이는 탈영병 이씨였다. 이씨는 게시판에 ‘거사에 동참하겠다’는 글을 띄웠고 사씨는 이런 답장을 보내 그를 공범으로 끌어들였다. “올린 글 보고 메일 드립니다. 전 34세, 남자구요. 제게 ‘아이템’도 있습니다. 긴말 필요 없고 우리 (강도) 한번 합시다.” 사씨는 이런 식으로 고씨와 배달원 이씨까지 포섭해 범행에 나섰다.
물론 사씨가 이들을 무조건 ‘동료’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그는 이들에게 늦은 저녁시간 인적이 드문 공원이나 역 근처에서 만나자고 제안해 한 명씩 ‘면접’을 봤다. 경찰에 따르면 사씨는 이들과 일 대 일로 만나 ‘이제까지 살아온 과정은 어떠한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이런 일 해본 적은 있나’,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 있는가’ 등의 질문을 통해 자질을 테스트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모인 사씨 등 일당 4명은 ‘그들만의 회의’를 통해 ‘퍽치기’, ‘아리랑치기’, 부녀자 납치, 부유층 주택강도 등의 ‘아이템’에 대해 논의하고 계획을 세워 하나씩 실행에 옮겼다.
이들은 만난 지 하루 만에 ‘의기투합’해 전국을 돌며 무차별적으로 강·절도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지난 6월2일 새벽 1시30분께 사씨 일당은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 카페에 손님으로 가장하고 들어가 첫 범행을 저질렀다. 카페 안에 여주인 김아무개씨(56)와 김씨의 친구 등 4명의 여자들만 있는 것을 확인하고 흉기로 이들을 위협해 현금 12만원과 목걸이 등 1백20만원 상당의 금품을 빼앗았던 것.
이들은 지난 4일엔 대전에서 새벽기도를 가던 한 40대 여성을 상대로 퍽치기를 해 현금 2만원을 갈취했고, 9일에는 술에 취해 벤치에서 잠들어 있던 김아무개씨(24)를 길에서 물건을 주워가듯이 자신들의 승합차에 태워 현금과 신용카드 등 3백여만원을 강취했다.
이런 식으로 이들이 2일부터 9일까지 일주일 동안 벌인 강도행각은 줄잡아 22차례, 모두 1천3백만원 상당의 금품을 빼앗은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이들의 범행에 대한 첩보를 입수해 물밑 추적을 벌인 끝에 4인조 모두를 검거할 수 있었다.
한 경찰 관계자는 “사씨 일당은 자신들의 승합차를 타고 여기저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훔치고, 빼앗았다. 그 수법은 모두 좀도둑 수준이다. 빼앗은 현금도 대개는 보통 몇 만원에서 많아야 20만~30만원 정도”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수사를 하면서 가장 의아했던 점은 어떻게 만난 지 하루 만에 생면부지의 사람들끼리 숙식을 함께하면서 이런 범죄를 저질렀나 하는 것이다. 보통 범죄자들은 의심이 많아 공범끼리도 신뢰하지 않는데 이들의 행각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이들이 제2의 ‘지존파’를 꿈꾸며 말 그대로 폼나게 한탕하려 했지만 결국 폼도 안 나는 잡범이 됐다”고 전했다.
경찰은 ‘폼나게 한탕’ 카페의 다른 회원들에 대한 수사도 계속 진행중이다. 이 사건을 담당한 한 형사는 “카페 회원 대부분이 범행을 예비하거나 이미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모두 실명을 사용하지 않아 수사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또한 이들 회원들이 아직도 서로 채팅과 이메일을 통해 연락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지만 한 곳에서 10분 이상 접속하지 않고 장소를 계속 옮겨 경찰의 IP추적도 따돌리고 있다”며 “이제는 좀도둑들도 IT 수준이 높아져 수사하는 경찰만 애먹게 생겼다”고 푸념을 늘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