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은 극동가스 재경부의 권아무개 대리(35)가 저지른 ‘대형 사고’에서 비롯됐다. 권씨는 지난 3월부터 7월까지 4차례에 걸쳐 총액 4백70억원 규모의 위조한 회사어음을 외환은행에 제시, 어음할인을 통해 4백24억원을 편취했다. 어음 위조 사실은 외환은행이 이 어음을 증권예탁원에 예치하는 과정에서 드러났고, 그는 결국 지난 1일 경찰에 체포됐다.
이 사건을 수사중인 경찰은 권씨가 피해금액 중 3백억여원 정도를 선물옵션 투자로 날렸고 60억원을 개인용도로 사용해 통장에는 70억원이 채 못 되는 돈이 남아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진 지난 2일 하루에만 극동가스의 주가는 14%나 급락했다. 권씨의 ‘사고’로 극동가스가 거액 손실을 입게 된 것으로 해석한 탓이었다.
그러나 정작 극동가스측은 그다지 흔들림이 없는 모습이다. 한 극동가스 관계자는 “사건의 본질은 권씨가 회사 돈을 횡령한 것이 아니라 가짜 어음으로 외환은행에 피해를 입힌 것”이라며 “사실 이 사건은 우리 회사와는 아무 상관없는 금융사기다”라고 주장했다. 즉 극동가스가 직접 금전적 손실을 당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
하지만 외환은행측은 “우리로서는 극동가스의 자금담당 직원인 권씨가 회사의 명판과 법인인감을 찍은 어음을 제시했으니 당연히 지급한 것뿐이다”며 극동가스측에 책임을 넘겼다.
이번 사건은 어음 위조로는 사상 최대 규모. 과연 약 4백20억원에 이르는 피해액은 누가 책임져야 할까. 양측의 주장에 따라 사건의 전후와 의문점을 살펴봤다.
먼저 극동가스가 의혹을 제기하는 점은 ‘왜 외환은행이 거액의 어음할인대금을 수표로 발행했느냐’다. 극동가스는 “수백억원대의 어음을 할인하는데 발행사에 확인도 없이 법인계좌에 입금하지 않고 현금이나 마찬가지인 자기앞수표를 발행하는 것은 공모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외환은행의 기업어음 담당자인 A씨와의 공모설을 주장했다.
금융가에서 어음할인시 수표를 발행하는 것이 극히 드문 일이라 이 같은 의문은 외환은행이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외환은행의 한 관계자는 “어음대금을 수표로 발행하는 것이 예외이긴 하지만 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어음 업무에서는 기업이 소위 ‘갑’의 입장이다. 약자인 은행으로서는 기업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며 “게다가 우량한 상장기업인 극동가스의 어음담당자인 권씨가 수표발행을 요구했으니 A씨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이 관계자는 “어음이 수백억원대이지만 어음시장에서 그 정도는 보통 규모”라고 덧붙였다.
외환은행의 주장대로 극동가스 직원 권씨의 단독범행이라 할지라도 문제는 남는다. 우선 위조 어음이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냐는 점이 쟁점이다. 만약 한눈에 봐도 어음이 위조된 걸 알아챌 만큼 조잡했다면 외환은행측은 부주의로 인한 일정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극동가스는 “어음은 컬러복사기로 위조해 일반인이 봐도 구별할 정도로 조잡하다. 어음전문가인 외환은행 A씨가 몰랐을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외환은행은 “위조어음이 아주 정교해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라며 “A씨가 당시 어음이 위조된 것을 알았다면 위조어음을 들고 직접 증권예탁원까지 갔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또 이 관계자는 “오히려 사건이 터지자마자 극동가스가 우리직원 A씨의 연루 의혹을 제기하고 A씨에게 송사를 제기하는 등 미리 준비한 것처럼 척척 일을 진행하는 저의가 수상하다”고 말했다.
현재 경찰은 전문가에게 의뢰해 위조 어음의 정교성 여부를 가릴 예정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수사가 진행되면서 드러난 일부 정황은 외환은행측에 그다지 유리해 보이지 않는다.
이 사건을 맡은 동부경찰서의 한 수사관은 “위조 어음에 사용된 명판과 법인인감이 극동가스가 어음발행을 위해 외환은행에 등록한 것이 아니라 권 대리가 위조한 것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극동가스의 한 관계자는 이를 토대로 “위조 어음에 찍힌 명판과 법인인감의 글자체가 우리가 외환은행에 등록한 것과 달라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알 수 있을 정도”라며 책임을 외환은행측에 떠넘겼다.
이제까지 외환은행은 ‘극동가스의 기업어음 담당자가 회사의 명판과 법인인감이 찍힌 어음을 제시했으니 우리는 당연히 어음할인대금을 지급한 것뿐이다’는 주장을 펴왔다. 그러나 위조 어음에 사용된 명판과 법인인감마저 가짜로 판명돼 외환은행은 당혹스러운 눈치다.
더욱이 극동가스는 “권 대리가 과거 기업어음 담당자였으나 지난 3월 이후 보직이 변경되어 더 이상 어음업무를 담당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외환은행의 A씨가 권 대리와 어음업무를 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극동가스는 이런 점들로 보아 이번 사건이 권 대리가 외환은행의 직원과 공모했거나 최소한 외환은행측의 부주의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은 이 같은 의혹에 따라 외환은행 A씨와 극동가스 권 대리의 대질심문까지 벌였지만 공모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한 수사관은 “대질심문에서 두 사람 모두 공모를 부인했고 공모를 입증할 만한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직접적인 현금 손실이 없는 극동가스는 상대적으로 느긋한 편이고 이미 어음할인대금으로 4백24억원을 지급한 외환은행은 초조한 입장이다. 아직까지는 두 회사가 권씨 등 개인만을 고소한 상태지만 회수가 불가능한 피해액을 두고 법인끼리의 법정 다툼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권씨의 은행 계좌에 남아 있던 돈 등을 빼면 이번 사건으로 인한 실제 피해액은 3백50억원 안팎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적자로 고생하고 있는 외환은행으로서는 부담하기 어려운 금액. 극동가스 역시 연간 당기순이익을 훨씬 초과하는 큰 액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