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권철현, 박진, 정문헌, 안영근 | ||
주인공들은 한나라당 권철현 박진 정문헌 의원과 열린우리당 안영근 의원. 이들 중 한나라당 세 의원은 해당 국회 상임위 국감 과정에서 국가기밀 유출과 ‘민중 사관’ 고교 교과서 논란의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우선 교육위 소속인 권철현 의원은 국정감사 첫날인 4일 교육인적자원부 감사에서 “7백1개 고교가 교과서로 채택하고 있는 금성출판사 간행 ‘한국 근현대사’의 전반적 내용이 친북-반미-반재벌 관점에서 쓰여졌다”고 주장해 이른바 ‘색깔론’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또 같은 날 박진 의원은 국방위의 국방부 감사에서 “북한이 침공 때 한국군이 단독으로 방어할 경우 서울 방어선이 16일 만에 붕괴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발언으로, 정문헌 의원은 통일외교통상위의 통일부 감사에서 북한의 급변사태시 정부 비상대처 방안을 담은 ‘충무 3300’ ‘충무 9000’ 계획 내용을 공개해 국가기밀 유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반면 열린우리당 안영근 의원은 같은 상임위(국방위) 소속인 박진 의원을 ‘스파이(Spy)’라고 지칭해 국감 중단 사태를 초래한 바 있다.
이와 관련, 여의도 정가에선 네 사람의 언행을 두고 다양한 얘기가 나오고 있다. 개중엔 일부 의원들이 평소의 성향과 다른 면모를 과시하고 나선 것을 정치적 진로와 연결짓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 개인의 특성에 빗댄 ‘가십(Gossip)’성 뒷얘기도 적지않아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우선 ‘파행 4인방’ 중 최다선(3선)인 권 의원은 그동안 비교적 ‘개혁적’이란 평가를 받아 온 터라 이번에 이념공세를 제기하고 나선 데 여야 모두 의아해 하는 분위기가 적지않다. 권 의원이 정치입문 전 흥사단, 공명선거운동협의회 등 시민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전력에다 남경필 정병국 의원 등 소장 개혁파들과 교감을 나눠 왔다는 점을 감안한 반응이라 하겠다.
실제 권 의원측은 이번 국감에서 교과서 문제 제기 여부를 놓고 상당히 고민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사안의 성격상 교과서 사관의 문제가 ‘색깔론’의 범주에 드는 만큼 다양한 계층으로 부터 자문을 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는 찬반을 기준으로 대략 6 대 4 정도의 비율을 나타났다는 것이 권 의원측의 설명. 진보-개혁 진영으로부터 “권철현은 맛이 갔다”는 비판이 거세겠지만 상대적으로 그동안 영향력이 취약했던 보수층에게 어필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란 판단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당내에선 권 의원의 ‘우향 우’ 행보를 내년 원내대표 경선과 연관지어 해석하는 시각이 많다. 2002년 부산시장 경선에 나섰다 실패하고 이어 12월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정치적 진로를 놓고 고민해 온 권 의원이 중앙 정치무대에서 활로를 찾겠다는 판단이 서면서 상대적으로 소원했던 당내 보수층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색깔론을 카드로 꺼냈다는 것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른바 ‘먹튀’ 주장이다. ‘먹튀’는 프로 스포츠에서 높은 계약금이나 연봉을 받고 이적한 선수가 이적한 팀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활약을 보일 때 그 선수를 일컫는 말로, ‘먹고 튀었다’의 준말.
권 의원을 두고 ‘먹튀설’이 나온 것은 그가 국감 시작일인 10월4일 문제의 주장을 제기해 놓고는 이틀 후인 10월6일 김원기 국회의장과 열린우리당 김명자 정의용 의원과 함께 14박15일 일정으로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캄보디아 등 동남아 4개국 순방길에 오른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한나라당 한 재선 의원은 “권 의원의 비상한 머리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국감 첫날 ‘한방’ 터뜨리곤 유유히 외유길에 오르는 것을 보고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부럽기도 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너무 약삭빠른 것 아니냐는 생각이 저절로 들더라”고 말했다.
박진 의원과 관련해서도 여러 얘기가 나온다. 박 의원은 40대 후반(56년생)에 경기고-서울대 법대(학사)-미 하버드대(석사)-옥스퍼드대 졸업(정치학 박사)에 외무고시 합격(11회), 청와대 공보-정무비서관 역임 등 화려한 경력을 갖춘 차세대 주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당내에선 박 의원이 한국국방연구원(KIDA)이 만든 2급 군사기밀, 그중에서도 최악의 경우이자 가장 가능성이 낮은 시나리오인 ‘주한미군 없을 경우 남침 16일만에 서울 함락’을 공개하며 ‘안보 불안’을 제기한 데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적지않았다. 평소 국제관계, 특히 한미관계에 정통한 국제전문가로 대여 이념공세에 부정적 반응을 보였던 박 의원 답지 않다는 평가도 많았다.
당장 당내에선 박 의원의 이번 ‘강경 보수’ 행보를 ‘대망론’과 연결짓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지난 3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대표 경선에 출마했던 박 의원의 전력에 비춰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 지도자’로 자신을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한 행보에 나선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2006년 서울시장 선거를 염두에 뒀다는 얘기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와 관련, 눈길을 끄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박 의원의 최근 행보와 관련해 불교계 한 고승의 코멘트가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다. 주변의 전언에 따르면 박 의원은 2002년 대선이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아 경기도 K군 소재 D사라는 사찰에서 S스님을 만나 향후 운세를 물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S스님은 정-관계 고위 인사들 사이에 법력이 높아 앞날을 예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정평이 난 인물. S스님은 박 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향후 정치적 진로가 밝으니 열심히 해 보라”는 얘기를 듣고 크게 고무됐던 것으로 전해졌으며 이 일이 올해 3월 초선, 그것도 2002년 8·8 재보선에서 당선돼 국회에 들어온 지 1년6개월만에 대표 경선에 나섰던 것과 무관치 않다는 얘기도 거론된 바 있다.
정문헌 의원은 앞선 권·박 의원과 달리 국감을 통해 ‘화려한’ 가계가 화제가 된 경우다. 정 의원은 한나라당내에서 박근혜 대표와 남경필 이종구 의원 등과 함께 정계 거물의 자녀를 일컫는 이른바 ‘태자당’의 일원이다. 그의 부친은 11~12대, 14~15대 국회의원과 정무장관을 지냈으며 현재 당 고문인 정재철 전 의원이며, 역시 48년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된 이래 63년까지 5선 의원을 지낸 전진한 전 의원(작고)이 외조부다. 친가와 외가를 합치면 3대에 걸쳐 선수로만 10선에 이르는 정치명문가다.
당내에서 몇 안되는 386세대(66년생)으로 고려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정 의원은 부친의 후광에다 보수적인 지역구(강원도 속초·고성·양양) 정서를 고려할 때 향후 ‘젊은 보수’로서 적지 않은 활약을 보일 것이란 예상을 낳고 있다. 정 의원은 이 같은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자신을 둘러싼 기밀누출 논란에 대해 “여당이 그토록 중대한 비밀임을 강조하는 충무계획에 대해 정동영 통일부 장관도 답변을 통해 ‘충무 9000 계획은 통일부 주관이며 충분히 보완-발전시키고 있다’고 답변한 만큼 여당 논리대로라면 정 장관도 기밀을 유출한 셈”이라고 정면반박하기도.
안영근 의원은 안정과 개혁, 대야 강공과 온건을 수시로 오가는 ‘좌충우돌’ 행보로 화제를 낳고 있다.
한나라당 탈당파인 ‘독수리 5형제’의 일원인 안 의원은 문제의 ‘스파이’ 발언 이전엔 국가보안법 개폐 논란에서 개정론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열린우리당내 재야-학생운동권 인사들로 부터 ‘운동권 출신 보수파 좌장’이란 그다지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기도 했다. 유신시절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한 전력과, 지난해 10월20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는 빨간 안경을 쓰고 나와 한나라당의 색깔론을 맹렬히 질타했던 안 의원이었기에 당내 국보법 폐지론자들로선 배신감을 느낄 법도 했다는 지적이다.
국방위 기밀유출 논란에 대한 안 의원의 입장은 비교적 명쾌하다. 한나라당 박진 의원의 행동은 “국감 스타가 되기 위한 영웅심의 발로”이며 자신은 “언제 정치를 그만두더라도 기밀 누설은 절대 용납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내에선 최근 안정성향을 강하게 표출해온 안 의원이 유독 국가기밀 논란과 관련해 당 지도부가 곤혹스러워 할 만큼 ‘초강경’으로 선회한 데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당내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도 그동안 안 의원이 본의 아니게 ‘트러블 메이커’로 행동해 왔던 것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는 시각이 적지않다. 지난 5월 당시 총리 지명을 놓고 ‘김혁규 불가론’를 제기해 청와대와 열린우리당간 불화의 불씨를 만들었던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안 의원은 “대통령이 당초 다수당에 총리 추천권을 주겠다고 약속한 만큼 열린우리당과 상의해 적절한 후보를 물색했어야 했다”고 주장했었다.
안 의원은 또 신기남 전 의장 부친의 친일 의혹 문제로 당이 혼란스러웠던 8월 중순에는 핵심 당직자의 신분(제2정조위원장)이면서도 “이 정도면 정치할 자격이 없다”며 ‘극언’을 퍼부어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