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40대 남성 한 명이 한강에 투신 자살했다. 부천 초등학생 피살 사건의 희생자 가운데 한 명인 임아무개군의 큰아버지였다. 그는 범인을 잡지 못하는 경찰을 원망하는 유서를 남겼다.
10월에는 40대의 한 경찰관이 야산에서 목을 맸다. 그는 포천 여중생 사건을 수사하던 포천경찰서 소속 강력반장이었다. 목을 매는 그 순간까지 그는 범인을 잡지 못하는 중압감에 괴로워했다.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은 공소시효가 다 지나가도록 여전히 범인의 윤곽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화성은 이제 ‘미제 사건’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그런 화성에서 최근 또 한 명의 여대생이 살해된 채 발견됐지만, 이 역시 자칫 미제의 악령이 덧씌워질 듯한 ‘불길한’ 분위기다.
또 다른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을 뻔했던 부유층 노인 연쇄살인사건은 살인마 유영철의 자포자기식 자백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울 서남부 지역 연쇄살인사건은 여전히 오리무중을 헤매고 있다.
왜 범인을 잡지 못하는 걸까. 수사력의 한계를 탓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하지만 “경찰에만 모든 것을 맡기지 말고 시민들의 관심과 제보가 중요하다”는 일선 형사들의 토로도 흘려 들을 수만은 없는 대목이다. “미제 사건으로 전락하는 길은 곧 국민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한 범죄수사 전문가의 충고에도 귀기울여야 한다.
<일요신문>은 숱한 살인 및 실종 사건 가운데 여전히 미궁속을 헤매고 있는 10건의 대형 사건을 선정해서 다시 한번 범행 당일의 범죄 현장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2000년대 들어 최근 5년간 발생한 사건 가운데 비교적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강력 사건들로만 그 대상을 한정했다.
이번 연재 시리즈가 미해결 사건들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작은 단서라도 찾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언제까지고 우리들이 ‘살인’을 ‘추억’만 하고 있을 순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5일 오후 9시께 경기도 포천경찰서. 포천시 소흘읍에 사는 한 40대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곧 집에 들어오겠다던 딸아이가 몇 시간이 지나도 안 들어오고 있다”며 실종신고를 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아버지의 애끓는 전화가 ‘포천여중생 납치살인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예의 ‘딸아이’는 포천 D중학교 2학년 엄아무개양(15). 엄양은 이날 친구 집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에게 휴대전화를 걸었다. “곧 집에 들어갈게요.” 이때가 오후 6시20분쯤. 그후 엄양의 모습은 동네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경찰은 사라진 엄양이 누군가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보고 즉각 대대적인 수색에 들어갔다. 그러던 지난해 11월28일 엄양의 집에서 8km 떨어진 도로변에서 엄양의 가방과 신발, 휴대폰이 발견됐다. 경찰은 엄양이 범행 피해를 입은 것으로 여기고 수색을 더욱 확대했다. 그러나 결국 엄양은 지난 2월8일 실종된 지 96일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가족의 곁에 돌아왔다. 마치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처럼 옷이 벗겨진 채 배수로에 처박힌 모습으로.
엄양의 사체가 발견됨으로써 수사는 잠시 활기를 띠는 듯했지만 이내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지난 5일로 벌써 사건이 일어난 지 1년. 그동안 수색과 수사에 동원된 경찰 병력이 1만5천여 명, 서울·경기 지역의 차량 조회만 1만8천여 건에 달했고, 통신 수사와 탐문 수사로 경찰 조사를 받은 사람도 2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용의점을 지닌 인물은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 와중에 사건 수사를 책임진 강력반장이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했다.
지난 17일 기자가 다시 찾은 엄양 사건의 수사본부에선 담당 형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사본부의 한 관계자는 “담당 수사반장의 자살 후 수사가 잠시 침체되기는 했지만 원점부터 재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범인이 엄양의 사체와 유류품에 남긴 범행수법 등을 연구하며 사건의 단초를 하나씩 다시 짚어가고 있다. 수사 관계자는 “모든 수사기법을 동원했지만 이렇다 할 증거가 나오지 않아 우리도 애를 먹고 있다. 다시 엄양의 사체와 유류품, 그리고 그것들이 발견된 장소로부터 시작해 샅샅이 뒤지고 있다”고 전했다.
우선 경찰은 배터리가 분리된 채 발견된 엄양의 휴대폰에 주목하고 있다. 경찰은 범인이 휴대폰 배터리를 분리한 이유가 ‘위치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보고 있다. 수사본부의 한 관계자는 “휴대폰은 전원을 켤 때와 끌 때, 그리고 통화중일 때 통신회사 기지국에서 휴대폰 단말기의 위치가 등록되게 된다. 그러나 배터리를 분리해 버리면 그 위치를 찾아낼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런 사실은 통신회사 내에서도 극히 일부의 기술자만 알고 있는 내용이고 수사관 중에서도 이런 사건을 맡아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전문적 지식이라는 것. 수사 관계자는 “범인은 범행 전부터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히 계획해 치밀하게 범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둘째로 경찰이 의미를 두는 단서는 엄양의 이름 부분이 찢겨진 공책과 학원수강증이다. 엄양의 유류품은 모두 실종 당시 그대로 발견됐으나 유독 엄양의 공책과 학원수강증만은 엄양의 이름이 쓰여진 부분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로 발견됐다. 이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
한 수사 관계자는 “바로 이 점이 범인이 엄양을 잘 알고 있는 면식범이라는 증거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범인이 엄양의 물건 중 다른 것은 그대로 두고 가방 안에 있는 공책과 학원수강증만을 일부러 찾아내 이름 부위를 찢어 쓰레기 더미에 던져버린 것은 엄양의 흔적을 지워버리려고 한 행동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 범죄심리학자는 “범인이 엄양의 이름이 알려지면 자신이 지목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찢어버린 것으로 보인다”고 경찰의 주장에 무게를 실어줬다.
셋째, 외상 흔적 없이 깨끗한 상태로 발견된 엄양의 사체 또한 범인의 숨겨진 면모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키로 여겨지고 있다. 엄양의 사체는 집에서 6km 떨어진 한 낚시터 맞은 편 식당 앞 배수로에서 알몸 상태로 발견됐는데 머리부터 가슴부위까지는 심하게 부패됐지만 목졸림이나 결박의 흔적은 없었고 하체는 부패하지 않고 깨끗한 상태였다.
처음에 경찰은 엄양이 성범죄 피해를 입고 살해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부검결과 정액 음성 반응이 나왔고 성폭행이나 성관계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수사 관계자는 “부검결과 사체의 상반신이 심하게 부패돼 직접 사인은 밝힐 수 없었다. 그러나 엄양의 사체는 폭행의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고 밝혔다.
범죄심리 전문가들은 이런 점을 들어 범인이 성불능 환자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한 전문가는 “범인은 성인 여성과 정상적인 성관계가 불가능한 성불능이기 때문에 성인 여성보다는 상대적으로 통제하기 쉬운 어린 여성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한 엄양의 손·발톱에 칠해진 빨간색 매니큐어는 범인이 변태성욕자임을 시사하는 부분. 당시 엄양의 사체사진을 정밀히 분석한 한 전문가는 “매니큐어가 엄양 사망 후 칠해진 것으로 보인다”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엄양의 교복과 속옷, 스타킹 또한 범인의 ‘얼굴’을 그려낼 수 있는 또 하나의 단초라 여겨지고 있다. 경찰은 교복과 속옷, 스타킹은 범인이 가지고 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수사 관계자는 “많은 범죄 전문가들을 만나 조언을 듣고 내린 결론이다. 특히 FBI의 대표적인 프로파일링(사건 현장의 단서만으로 범인의 성격, 외모, 심리 등을 추정하는 것) 전문가가 쓴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를 형사들끼리 돌려가며 보고 있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는 FBI 범죄분석관인 로버트 K. 레슬러가 희대의 연쇄살인마나 엽기적인 흉악범들과 직접 인터뷰를 통해 쓴 것으로 저자는 처음으로 ‘연쇄살인범’(serial killer)이라는 말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경찰은 범인이 이 책에서 설명한 ‘물품음란증’ 환자인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범인이 엄양을 살해한 후 교복과 스타킹 등을 하나의 ‘기념품’으로 생각하고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 수사 관계자는 “범인이 피해자의 물건을 보고 범행 당시를 떠올리며 쾌감을 느끼거나 자위행위를 하는 변태성욕자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아 범인은 단순한 변태성욕자가 아니라 ‘아주 영리한’ 변태성욕자일 가능성이 높다. 범인은 엄양의 유류품만 남겼을 뿐 자신의 흔적은 하나도 현장에 남기지 않았다.
한 수사 관계자는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흔적도 없이 범행을 저지른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정신질환자였다면 범행 과정에서 이런저런 흔적을 흘리게 마련인데 범인은 평소엔 살인의 광기를 숨기고 정상인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경찰이 찾아낸 몇 가지 단서들은 베일 속 범인의 윤곽을 그려내는 단초가 되고 있다. 범인은 변태성욕자로 엄양을 잘 알고 있는 면식범이며, 엄양의 사체와 유류품을 버린 곳으로 보아 이 일대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자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엄양이 사라진 현장과 유류품과 사체가 발견된 곳 모두 소흘읍 안이다.
어쩌면 범인은 그간 경찰이 조사한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범인은 범행장소 주변에서 경찰을 조롱하며 ‘살인의 추억’을 음미하고 있을 수도 있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순간도 경찰의 ‘퍼즐 맞추기’가 계속되고 있으며, 언젠가는 그 퍼즐이 완성되리라는 사실이다.
5가지 단서로 본 범인의 실체
1.휴대폰 배터리 분리 - 전문지식 갖춘 지능범
2.이름 찢겨진 공책 - 엄양 잘 아는 면식범
3.깨끗한 사체 - 성불능 환자
4.사후에 칠한 매니큐어 - 변태성욕자
5.발견되지 않은 교복 - 물품음란증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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