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센터 여주인의 시신이 버려졌을 곳으로 추정되는 농수로. 아래는 화재가 났던 카센터 자리. | ||
“불이야!” 경광등을 밝히며 소방차가 비상출동하고 놀란 동네사람들이 하나둘 현장에 나와 발을 동동 굴렀다. ‘제발 인명 피해라도 없어야 할 텐데….’
주민들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카센터 내부에서는 불에 탄 40대 여성과 두 어린이의 사체가 발견됐다. 이때만 해도 주민들은 그저 애꿎은 ‘화마’만 원망할 뿐, 이 화재 가 미궁에 빠질 살인사건의 서막이라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화재 현장에서 사망한 두 어린이는 카센터 주인 김아무개씨(45)의 쌍둥이 자녀(8·초등학교 1학년)로 밝혀졌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 발견된 40대 여성의 사체를 두고 ‘해프닝’이 벌어졌다. 두 남자가 서로 자신의 아내라고 주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화재로 자녀를 잃은 카센터 주인 김씨와 카센터와 이웃한 G농기계상 주인 최아무개씨가 바로 그들. 최씨가 사체로 발견된 여성이 자신의 아내라고 여기게 된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사고 직전인 새벽 1시께 최씨의 아내 김아무개씨(43)가 “카센터 아저씨가 낚시 갔다오다 교통사고가 났다. 카센터에 가봐야겠다”는 말을 아들 최아무개군(17)에게 남겼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일단 장례부터 치르려는 가족들을 위해 급히 사체의 디엔에이(DNA) 검사를 의뢰했다. 사건 발생 일주일 뒤 문제 여성의 사체는 G농기계상의 여주인 김씨(최씨의 아내)로 밝혀졌다.
자연스레 사건의 초점은 화재 이후 갑자기 행적이 묘연해진 카센터 여주인 김아무개씨(40)에게 모아졌다. 경찰은 김씨를 일단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행적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건 발생 8일째인 5월10일 카센터 여주인 김씨는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사체는 사건 현장으로부터 약 11㎞ 떨어진 서천군 기산면 용곡리 길산천의 다리공사 현장에서 발견됐다. 당시 김씨는 바지가 벗겨져 있었고 목에 예리한 흉기에 찔린 상처가 남아 있었다.
경찰은 사체가 인근 길상천을 따라 떠내려온 것으로 보고 상류를 수색해 1.7㎞ 떨어진 봉선저수지 부근에서 김씨가 입고 있던 ‘추리닝’ 상의와 점퍼를 찾아냈다. 이 옷들은 저수지 아래 언덕에서 발견됐는데 인근 수로로 연결된 부분의 풀들이 쓸려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옷가지가 발견된 곳에서 범인이 살인을 하고 수로에 사체를 버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경찰은 우선 당일 낚시를 갔다 돌아온 카센터 주인이자 피해자의 남편 김씨를 조사했다. 김씨는 이날 밤 9시부터 새벽 3시까지 낚시를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낚시광인 그는 주말이면 부여와 강경으로 낚시를 다녔다. 사건 당시 함께 낚시를 한 동행자의 증언이 확실했다.
김씨의 통화기록에도 전날 밤 11시에 집으로 한 것, 그리고 당일 새벽 3시에 불이 났다는 전화를 받은 내역만 담겨 있었다. 이외에 사건 당일 새벽 1시를 전후해 김씨가 집으로 전화를 한 적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중간에 교통사고를 당한 사실도 없었다.
카센터 바로 옆에는 동네 젊은이들이 매일 밤 와서 놀다 가곤 하는 카오디오 가게가 있었다. 수사팀은 이곳에 들렀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거짓말탐지기까지 동원해 조사를 했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경찰은 이들 젊은이들로부터 단서가 될 만한 진술 하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사건 당일 밤 12시 집으로 돌아갈 때 하얀 모자를 쓴 남자 한 명이 카센터 여주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봤다’는 얘기였다. 수사팀은 이 남자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백방으로 행적을 탐문하고 있지만 그의 신원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수사팀은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사건과 카센터 여주인 피살사건을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정황으로는 ▲카센터 여주인이 농기계상 여주인을 전화로 불러 카센터를 잠시 맡긴 뒤 하얀 모자의 남자와 나갔다가 이 남자에게 변을 당했고 ▲이 남자는 자신을 봤던 ‘목격자’인 농기계상 여주인을 처치하기 위해 다시 카센터로 돌아와 살인과 방화를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화재 현장에서 사체로 발견된 농기계상 여주인 김씨의 기도에서는 그을음이 그다지 발견되지 않았다. 화재 이전에 이미 숨이 멎었을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김씨의 사체가 괴로워한 흔적도 없이 반듯이 누운 상태로 발견된 점도 범인이 그녀를 죽인 뒤 불을 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화재로 훼손된 것을 제외하곤 김씨의 몸에서는 아무런 외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대체 범인은 김씨를 어떻게 죽인 것일까. 살해수법을 파악하는 것은 범인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길. 경찰이 꼭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의문점은 시신과 유류품 발견 현장에서도 불거진다. 카센터 여주인 김씨의 사체가 발견된 곳(공사 현장)과 옷가지가 발견된 곳(봉산저수지)의 ‘상관관계’가 문제다.
현재 드러난 정황상으론 범인이 봉선저수지에서 김씨를 살해한 뒤 농수로에 버린 사체가 인근 길산천의 물길을 타고 1.7㎞ 떨어진 공사 현장으로 떠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공사 현장을 지나는 길산천과 문제의 농수로가 중간에 한 번 연결되기는 하지만 만약 농수로에 사체를 버렸다면 지형적 조건상 사체는 계속 농수로를 따라 흘러내려왔어야 ‘자연스럽다’. 또 길산천 주변에는 수풀 등 장애물이 많은데 사체에는 수풀에 긁힌 자국도 없이 깨끗한 상태였다.
이런 점들은 김씨의 사체가 ‘물길’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옮겨졌거나 진짜 살인 장소가 공사 현장일 가능성을 점치게 해준다. 만약 그렇다면 범인은 수사 혼선을 노리고 사체나 옷가지를 옮겨놓은 셈이다.
경찰은 하나의 단서라도 더 찾기 위해 길산천과 봉선저수지 일대를 샅샅이 수색했다.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은 카센터 여주인의 신발을 찾기 위해 이 일대의 버려진 신발들을 모두 수거해 일일이 대조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더 이상의 실마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옷가지가 발견된 저수지 일대는 인적이 드물고 외지인들이 쉽게 찾아오기 힘든 곳이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실마리’로 남아 있다. 범인이 어두움 속에서도 이곳에 시신이나 옷가지를 갖다 버린 것으로 보아 이 곳 지리에 익숙한 사람임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지난 7월 경찰은 화재사건 현장의 유류품 하나하나를 다시 검사하던 중 범인이 흘리고 갔을 것으로 보이는 허리띠 버클을 찾아냈다. 이 버클은 방화 피해자인 농기계상 여주인 김씨의 사체 옆에서 발견됐는데 범인이 김씨와 실랑이를 하다 떨어뜨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궁화 안에 태극마크가 찍힌 이 버클은 현재는 생산이 되지 않는 단종 상품. 수사팀은 따로 전단을 만들어 ‘주변에 태극무궁화 버클을 차고 다니던 사람이 있는지’ 수배중이다.
사건 발생 이후 서천경찰서 형사계 형사 15명과 충남지방경찰청의 강력계, 과학수사대, 광역수사대 등 4개반 6명은 수사본부를 만들어 보이지 않는 범인을 추적하고 있다.
이 사건을 수사중인 서천경찰서 최병수 형사는 “시간이 흐르더라도 반드시 범인을 잡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사건이 일어난 지 7개월이 흐른 현재 화재사건 현장은 잔해가 모두 철거된 상태. 카센터 주인 김씨는 가족을 잃은 슬픔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생업을 전폐한 채 서천군의 한 마을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있다. 농기계상 최씨 가족은 새 건물로 가게를 옮겨 생업을 계속하고 있다.
현재 유가족들과 경찰은 사례금 2천3백만원을 내걸고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제보자를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