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4일 모자를 납치해 신생아는 의뢰인에게 넘기고 생모를 살해한 혐의로 심부름센터 직원 3명과 피의자 김씨가 연행되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이들 일당이 범행에 사용한 ‘대포차’. | ||
어쩌면 영원히 미제사건으로 남겨질지도 몰랐던 이 비극의 진상이 밝혀진 것은 아기엄마가 현장에 남긴 휴대전화 때문이었다. 범인들이 죽은 아기엄마의 휴대전화를 차량에 넣고 다니다 결국 꼬리를 밟힌 것.
이처럼 범인들이 경찰에 검거되기까지의 과정을 리플레이해 보면 공교롭게도 우연으로만 여기기에는 석연치 않은 몇몇 장면들이 발견된다. 사필귀정이었을까, 아니면 죽은 아기엄마의 원혼이라도 작용했던 것일까.
사건은 피의자 김아무개씨(여·36)가 2003년 3월 현재의 남편 A씨(31)를 서울 중랑구 중화동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것에서 시작된다. 90년대 초에 결혼한 김씨는 당시 14세, 12세 된 남매를 키우던 가정주부였다. 그러나 김씨는 남편과 심각한 불화를 겪고 있었고 그러던 차에 A씨를 만나 새로운 사랑을 싹틔우기 시작했다.
두 달간 A씨와 교제를 하던 김씨는 결국 남편과 아이들을 버려두고 가출해 A씨의 집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얼마 뒤 김씨가 가정을 가진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A씨는 고민에 빠졌고, 한때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그러나 잘생긴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진 김씨는 다시 ‘과거’로 돌아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김씨는 흔들리는 A씨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이 A씨의 아기를 가졌다고 거짓말을 늘어놨다. 결국 A씨는 김씨의 얘기를 믿고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사실 김씨는 두 남매를 출산한 뒤 임신중절을 한 터라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상태였다.
한 번 시작한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서는 더 많은 거짓말이 필요한 법. 김씨는 간식거리로 살을 찌우면서 배가 불러오는 것처럼 시늉을 해야 했다. 결혼식 때는 심부름센터를 통해 가짜 하객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젠가 태어나야 할 아기가 문제였다.
결국 김씨는 가짜 하객을 부탁한 심부름센터에 아기를 구해줄 것을 의뢰했다. 4천만원을 선금으로 주고 아기를 구해오면 3천만원을 추가로 주기로 약속했다.
의뢰를 받은 심부름센터 정아무개씨(40·전과8범) 일당 3명은 전국의 고아원과 병원을 돌아다니며 아기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보호자가 항상 곁에 있어 신생아를 훔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김씨는 이틀마다 전화를 해 아이를 구하지 못하면 착수금을 돌려달라며 재촉했다.
이즈음 김씨는 남편 A씨에게 ‘미국 친정에서 애를 낳고 오겠다’고 속인 뒤 친구집에서 두 달가량 지내다 집에 돌아와 있었다. 신생아는 아직 비행기를 타지 못해 친정에 맡겨 놓았다고 변명했다. 거짓말을 돌이킬 수 없었던 김씨는 그날부터 이틀에 한 번 꼴로 정씨를 독촉했던 것이다.
신용불량자로 돈에 쪼들리던 정씨 등은 김씨가 약속한 거액을 결코 놓칠 수 없었다. 이미 착수금으로 ‘대포차’(음성적으로 거래돼 실 소유주 확인이 불가능한 차)를 구입하는 등 상당액을 써버린 터라 더욱 포기가 불가능했던 상황.
급기야 이들은 지난해 5월24일 오후 2시 경기도 평택시 한 주택가에서 생후 70일 된 아기를 안고 가던 피해자 K씨(여·21)를 납치했다. 아기를 곧바로 김씨에게 넘긴 정씨 일당은 K씨가 아기를 돌려달라고 발버둥치자 차 안에서 목을 졸라 살해했다. K씨가 이들의 얼굴을 본 이상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 이들은 K씨의 시체를 강원도 고성의 한 야산에 파묻었다.
납치한 아기를 김씨에게 전해준 정씨 등은 약속한 3천만원을 추가로 받았다. ‘일’은 모두 해결되었고 살인사건도 그대로 묻혀져 버릴 것처럼 보였다. 정씨는 나머지 일당 2명에게 차를 팔고 당분간 잠적해 있을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그 2명은 이 일을 그대로 묻어두지 못했다.
정씨의 조수 역할을 했던 두 사람은 정씨의 처남인 김아무개씨(40)와 박아무개씨(37). 이들은 정씨로부터 받은 수고비 액수가 불만이었다. 두 사람은 정씨에게 돈을 더 받아낼 수 없게 되자 애기를 전해준 김씨를 찾아가 돈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난해 7월, 9월, 10월, 심지어는 검거 4일 전인 올해 1월18일에도 김씨에게 “지금 돈이 없으니 돈을 좀 달라.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냐. 당신 덕에 우리도 좀 잘 살아보자.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알리겠다”며 협박해 총 5천1백만원을 받아냈다.
이들 2명은 이런 와중에도 범죄심리상 이해하기 어려운 실수를 계속 저질렀다. K씨를 죽인 이후에도 범행에 사용했던 차량을 그대로 몰고 다녔던 것. 이들이 차를 팔아버리라는 주범 정씨의 지시를 어겼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결국 이들이 꼬리를 밟히는 빌미를 제공한 것도 문제의 대포차였다.
지난 1월22일 강남경찰서 기동순찰대 소속 김행영 경장(34)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삼성동에 순찰차를 세우고 지나가던 차들의 번호를 차량조회기로 검색하고 있었다. 그러다 김씨와 박씨가 타고 가던 차가 뺑소니 차량으로 밝혀졌다.
김씨 등은 아기를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 천안에서 오토바이와 부딪혀 운전자에게 전치 2주의 부상을 입힌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타고다니던 차가 소유주를 알 수 없는 대포차라는 것만 믿고 그대로 줄행랑을 쳐 뺑소니로 신고됐던 것. 워낙 가벼운 사고라 이후 이들은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갑작스레 순찰차가 따라오자 김씨와 박씨는 자신들의 범행을 들킨 것으로 오판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1km가량 도주하다 아예 차에서 내려 뛰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지원요청을 받은 경찰의 추적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을 붙잡은 김 경장은 경미한 교통사고를 낸 이들이 필사적으로 도주했던 점에 의심을 품었다. 차량을 수색하던 김 경장은 조수석 글로브 박스에서 배터리가 빠진 휴대전화 한 대를 발견했다. 이 전화기에 대해 두 사람에게 묻자 “아는 여자가 준 것”, “길에서 주운 것”이라는 엇갈린 진술이 나왔다.
휴대전화에 내장된 번호를 검색해 처음 뜬 번호로 전화를 하자 상대방은 “지난해 5월 실종됐다가 20일 뒤 시체로 발견된 친구의 전화번호”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경찰의 끈질긴 심문에 이들은 결국 사건의 전모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들은 왜 유력한 증거인 피살자 K씨의 휴대전화를 그때까지 버리지 않고 있었을까. 이들은 범행 당시 K씨의 휴대전화가 차 바닥에 떨어진 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나중에야 전화기를 발견해 그냥 차 안에 보관해 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휴대전화 배터리를 분리해놨던 것은 전파 추적을 피하려는 의도로 해석됐다. 만약 그렇다면 사건과 관련된 휴대전화라는 걸 알면서도 보관해온 셈이다.
가벼운 뺑소니 접촉사고, 죽은 아기 엄마의 휴대전화, 우연찮게 걸려든 차량조회…. 이 모든 것이 말 그대로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아기를 되찾으려던 K씨의 간절한 염원이 작용했던 걸까. 사건을 담당한 강남경찰서 이용우 강력3팀장은 “범인들이 나름대로 전화기 배터리를 빼놓기는 했지만 버리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경찰에게 잡히려고 전화기를 갖고 있었던 게지”라는 말로 그 ‘우연’을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