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지난해 10월27일 화성 여대생 노아무개씨(21)가 실종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지난 80년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떠올리며 “또 화성인가!”라는 우려 섞인 시선으로 이 사건을 주목했다. 그로부터 46일 만인 지난해 12월12일 노씨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면서 ‘살인의 추억’은 다시 끔찍한 현실로 되살아나고 말았다.
경찰은 막대한 장비와 인원을 투입해 베일 속의 범인을 쫓고 있지만 수사는 여전히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 지난 3일로 사건 발생 1백일째를 맞은 화성 여대생 피살사건. 다시 그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본다.
실종 당일 저녁 노씨는 화성시 태안읍의 한 스포츠센터에 들렀다. 이곳에서 수영을 마치고 나온 노씨는 오후 8시25분경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곧 집으로 간다”는 연락을 가족에게 남겼다. 그리고 버스를 탄 뒤 오후 8시35분께 집에서 2km가량 떨어진 와우리공단 정류장에서 하차했다. 이 버스 CCTV에는 노씨가 수영복 등이 들어 있는 가방을 들고 내리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노씨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집에 도착할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노씨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자 초조해진 가족들은 오후 9시10분께 노씨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를 근거로 경찰은 노씨가 와우리공단에서 하차한 후인 오후 8시35분에서 오후 9시10분 사이에 변을 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종 다음 날인 10월28일 노씨의 집에서 4km 떨어진 식당과 도로변에서 노씨의 휴대폰, 옷가지, 가방, 속옷 등 유류품이 차례로 발견됐다. 노씨가 누군가에게 변을 당했음을 확인시켜주는 단서였다. 특히 노씨의 유류품은 편도 1차선 도로변에서 2백~5백m 간격으로 겉옷에서 속옷 순으로 발견돼 범인의 범행 당일 동선이 드러나는 듯했다.
그러나 범인이 버린 노씨의 유류품은 오히려 경찰을 상당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사건을 담당한 화성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눈에 띄는 곳에 유류품을 버린 범인의 행동이 아주 대담하다고 생각했다. 통상 살인사건에서 범인은 사체와 함께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은닉하거나 없애버린다. 그런데 이 사건의 범인은 일부러 눈에 띄는 곳에 피해자의 소지품을 버리고 간 것이다. 경찰을 조롱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은 노씨의 유류품에서 범인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확보했다. 노씨가 실종 당시 입었던 청바지 오른쪽 다리부분 안쪽에서 두세 점의 혈액과 체액을 찾아냈던 것. 혈액은 노씨의 것으로 확인됐고, 또 다른 체액은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정액이었다. 경찰은 이 체액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DNA 샘플을 확보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샘플과 용의자들의 DNA를 대조해 범인을 가려내는 작업뿐인 듯했다. 자연 수사는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노씨의 주변 인물, 노씨 실종 시간대에 와우리공단 근처에서 휴대폰 통화를 한 사람 등 모두 1천여 명 이상의 ‘잠재적 용의자’들의 DNA를 채취해 대조해 보았지만 일치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경찰에 따르면 DNA는 유전자정보만을 제공할 뿐 사람의 신체적 특성이나 나이, 혈액형 등의 정보는 알 수 없어 용의자의 DNA와 대조용으로 활용할 뿐이라고 한다. 새로운 용의자를 찾아내지 못하면서 수사는 다시 답보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던 지난해 12월12일 노씨가 유류품이 발견된 곳에서 직선 거리로 1.6km 떨어진 정남면 보통리 야산에서 싸늘한 사체로 발견됐다. 노씨의 사체는 보통리의 한 마을 바로 위 산자락에서 발견됐는데 알몸 상태에서 옆으로 비스듬히 뉘인 모습이었다.
사체는 심하게 부패돼 사인이나 외상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부검결과 노씨의 위에서 실종 당일 점심으로 먹은 떡볶이와 김밥이 추출됐다. 노씨가 사건 당일 바로 살해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수사팀이 주목했던 점은 사체를 유기한 장소가 차도와 동떨어진 야산이라는 점. 한 수사 관계자는 “차로는 사체유기 장소까지 가기는 어렵고 범인이 마을을 지나 산자락 바로 아래에서 차에서 내려 노씨의 사체를 들고 3백m 정도 옮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종 당시 운전하는 차량 속에서 노씨를 제압한 점, 50kg이 넘는 노씨의 사체를 산위까지 옮긴 점 등으로 보아 범인은 둘 이상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됐다.
노씨의 사체가 발견된 뒤 인근 마을 주민들은 한결같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주민은 “범인이 이동한 길은 사람들이 다니지도 않은 길이다. 주변 사람들만 알 만한 길이지 외부에서 처음 오는 사람은 가려고 해도 못가는 길이다”고 말했다. 수사 관계자들은 “범인이 이 지역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 아니겠나. 정말 어려운 사건이다”고 털어놨다.
경찰은 노씨의 사체에서도 별다른 실마리를 찾지 못하자 노씨의 청바지에서 추출한 범인의 DNA에 다시 모든 것을 걸고 있다. 수사팀은 노씨가 평소 택시를 자주 탔다는 가족의 진술에 따라 인근 지역의 택시운전기사는 물론이고 노씨가 실종된 이후 화성지역에서 자취를 감춘 사람들, 사건 당일 인근 도로를 지나갔던 차량 소유자들에 대해서도 신원을 확보해 보강 수사를 벌이고 있다. 이들의 구강 내 타액에서 채취한 DNA를 범인의 DNA와 일일이 대조하고 있는 것.
과연 노씨의 청바지에 남아 있던 체액이 범인을 지목하게 될까. 한 수사 관계자는 “미제사건 파일에서 노씨 사건을 지울 때까지 수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