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출귀몰 술집 습격…그리고 빨간 잔상
애초 송씨는 지난해 12월부터 최근까지 인천 등지의 술집 여주인들을 7차례에 걸쳐 강도·강간한 혐의로 경찰의 추적을 받아왔다. 그러나 수사 결과 송씨가 저지른 범행은 지난 2년간 무려 1백36차례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송씨의 범행이 오랜 기간 발각되지 않은 것은 넓은 수도권 일대를 돌아다니며 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데다, 치밀하고 대담한 범행 수법과는 달리 전과가 없어 초기부터 수사망을 피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용불량자인 송씨가 주민등록까지 말소된 상태여서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경찰에 따르면 송씨가 강도 행각을 벌이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도박벽 때문이었다. 경기도 파주 인근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며 평범한 생활을 하던 송씨는 5년여 전부터 ‘하우스’(도박장)를 드나들며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도박으로 집과 식당까지 날려버린 송씨는 급기야 도박 자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2003년부터 흉기를 품고 수도권 일대에서 여성이 주인인 한적한 술집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송씨의 수법은 단순하면서도 용의주도했다. 송씨는 가게 문을 닫을 새벽 시간대에 빨간 모자를 쓰고 손님으로 가장해 술집에 들어가 기회를 엿봤다. 다른 손님이 있으면 술 한 잔을 시켜놓고 손님이 나갈 때까지 기다리다가 ‘작업’을 벌였다. 그는 범행 전 술집 여주인에게 “물수건 좀 달라”고 부탁한 후 물수건으로 자신의 지문이 묻은 술잔과 테이블을 깨끗이 닦은 후 빨간 장갑을 끼고 빨간 색 손잡이가 달린 과도를 들고 여주인을 위협했다.
송씨는 금품을 빼앗은 뒤 피해자들이 신고하지 못하게 할 요량으로 성폭행을 했다. 그런 후 피해자들이 쉽게 쫓아오지 못하도록 옷을 벗겨둔 채 그대로 달아났다.
애초 경찰은 “피해자들이 ‘범인이 아주 침착하고 자연스럽게 범행했고 변태적인 성관계를 요구했다’고 말해 동종 전과자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경찰의 추측과 달리 송씨는 전과가 전혀 없는 초보 범죄자였다.
한 수사관계자는 “송씨가 범죄재연 TV 프로그램을 꾸준히 보며 석 달이나 치밀하게 연구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초범일 경우 피해자가 비명을 지르거나 허둥댈 때 범인도 같이 당황하여 흉기를 휘두르거나 현장에 물증을 흘리는 사례가 많으나 송씨는 범죄재연 프로그램에서 보고 배운 대로 침착하게 행동했다. 피해자가 비명을 질러도 송씨는 흉기만 들고 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피해자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범행을 했다고 한다.
빨간 모자를 착용하고 범행한 이유에 대해 송씨는 “원래 빨간 색을 좋아했고 화투패의 빨간 색이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색깔”이라고 진술했다. 수사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일부 범죄자들이 특정 색깔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면서 “송씨가 지난 2년간 경찰에 붙잡히지 않은 게 행운이라면 행운이겠지만 피해자들로서는 커다란 불운이었다”고 말했다.
송씨의 ‘빨간색 집착증’은 수사과정에서도 또 다시 확인됐다. 경찰이 송씨를 구속한 후 송씨의 차량을 수색한 결과 차 안에서 문제의 빨간 모자, 빨간 장갑, 빨간 과도, 빨간 티셔츠, 빨간 운동화를 발견했던 것. 송씨는 초기에 주로 빨간 티셔츠와 빨간 운동화를 신고 범행했으나 지난해 12월부터 얼굴을 가리기 위해 빨간 모자를 쓰고 범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 ‘빨간모자’ 송씨의 차량에서 압수한 물건들. 빨간 색의 모자, 티셔츠, 장갑, 과도 등이 보인다. | ||
이번 사건을 해결한 인천경찰청 광역수사대 홍승만 강력반장은 “인천에서 발생한 7건의 사건을 분석해보니 ‘빨간 모자’ 동일범의 소행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또한 미결 사건을 조회해 비교해본 결과 지난 2년간 수도권 일대에서 1백 건 이상의 유사한 범행이 이루어진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면서 “이때부터 ‘빨간 모자’가 단순한 강간범이 아닐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어렴풋이나마 희대의 연쇄 강도·강간범 ‘빨간 모자’의 실체가 포착되는 순간이었다.
경찰은 ‘빨간 모자’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사건들을 모아 범행 장소와 시각 등에 대한 여러 가지 분석을 시작했다. 그러자 뚜렷한 특징이 하나 발견됐다.
그간 ‘빨간 모자’가 범행한 지역은 의정부, 인천, 고양, 안양, 안산, 구리 등지로 모두가 서울외곽순환로와 연결된 도로가 있는 도시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서울외곽순환로와 도로망이 연결된 파주에서만큼은 단 한 건의 범행도 시도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이 연고를 두고 있는 곳에서 범행을 하지 않는 것이 연쇄 강간범의 전형적인 패턴 중 하나”라는 범죄심리 전문가들의 분석도 뒤따랐다. 자연히 경찰 수사는 파주 지역 연고자에 집중됐다. ‘빨간 모자’ 송씨는 범행 현장마다 치밀하게 자신의 흔적을 지웠지만, 그가 저지른 수많은 사건의 궤적이 오히려 그의 존재를 드러내는 지시봉 역할을 했던 셈이다.
‘빨간 모자’의 범행이 대부분 한적한 주택가의 술집에서 이뤄졌다는 점 때문에 경찰은 “범인이 파주에 연고를 두고 해당 범행 지역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라 분석했다. 이를 토대로 경찰은 범인이 ‘이동성’이 많은 직업의 소유자일 것으로 추정했다. 한 수사관은 “범인의 직업으로 택시기사, 트럭 야채상, 이사짐센터 직원 등 다양한 추측을 해보았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이런 추정은 수사를 어렵게 만드는 또 하나의 벽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송씨가 자동차 영업과는 무관한 전력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송씨가 범행을 저지른 장소는 ‘하우스’ 주변의 주택가였다. 최근 들어 ‘하우스’가 한적한 주택가로 파고들면서 송씨의 범행 또한 이 주변에 집중됐던 것이었다.
그러던 지난 2월 ‘빨간 모자’가 강탈한 수표가 파주에서 발견되면서 수사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송씨가 수표를 사용하면서 수표 뒷면에 이서한 가짜 주민등록번호가 바로 숨겨진 단서였다.
수사팀은 ‘범죄자들이 수표에 이서할 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자신의 주민번호와 유사한 가짜 번호를 사용한다’는 점에 착안했다. 파주에 연고를 둔 20대 후반~30대 초반의 남성 가운데 수표 뒷면에 적힌 가짜 번호와 주민번호가 유사한 사람들을 추려내는 작업이 벌어졌다. 그 결과 용의점이 있는 24명의 사진과 명단이 작성됐다. 수사팀이 이들의 사진을 피해자들에게 보여주자 모두가 한 인물, 송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유력한 용의자 송씨의 신원은 확인됐지만 실제 송씨를 검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수사관계자는 “송씨가 신용불량자에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라 송씨 명의의 계좌, 휴대폰은 아예 없었다. 즉 송씨의 ‘전자적 흔적’이 나오지 않아 그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수사팀은 주변 인물들에 대한 조사를 통해 송씨에게 한 걸음씩 접근하기로 했다. 탐문과 통신수사 결과 송씨에게 동거녀가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그후 수사팀은 잠복 수사 끝에 동거녀의 집에서 나오던 송씨를 검거할 수 있었다. 당시 송씨는 빨간 모자가 아닌, 흰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한 수사관은 “아마 송씨가 인천에서 연달아 7건의 강간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빨간 모자’의 정체를 밝혀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면서 “세간의 주목을 끈 인천 사건들로 인해 수도권 각 관할경찰서에 흩어져 있던 유사 사건들이 하나로 엮어져 귀중한 단서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공조수사’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우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