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뱀 며느리’ 시댁돈 80억 ‘꿀꺽’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17일 남편과 시어머니를 속이고 80여억원을 가로챈 혐의(사기)로 오아무개씨(여·37)를 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 웃지 못할 사건은 이혼녀인 오씨가 2002년 서울 강남의 한 고급 와인 바에서 문아무개씨(38·의사)를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됐다. 문씨의 직업이 의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오씨는 자신의 이혼 전력을 숨긴 채 “나는 W건설회사 회장의 딸”이라며 은근히 접근해왔다. “명문여대를 나와 외식업체와 패스트푸드점 여러 곳을 운영하고 있다”는 오씨의 얘기에 문씨 또한 슬며시 관심을 나타냈다.
오씨의 화려한 옷차림, 세련된 매너와 말투, 화끈한 돈 씀씀이를 보며 문씨는 오씨가 ‘재벌가의 사람’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오씨는 실제로 서울 강남에 패스트푸드점 하나를 운영하고 있던 터라 문씨는 오씨의 거짓말에 쉽게 넘어갔다. 문씨는 오씨에게 호감을 가졌고 급속히 가까워진 둘 사이엔 자연스레 혼담이 오갔다.
오씨는 의사인 문씨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고급 외제차를 끌고 다녔고 명품 옷으로 자신을 치장했다. 그러나 돈 씀씀이가 커지면서 오씨의 빚 또한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신용카드 연체금과 사채 빚에 허덕이기 시작한 오씨는 2002년 3월 “패스트푸드 체인점 하나를 인수하려고 하는데 돈이 필요하다. 사업만 잘 되면 바로 갚아주겠다”며 문씨에게 ‘급전’ 1억2천만원을 요구했다.
어쩌면 재벌가의 사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사랑 때문이었을까. 문씨는 오씨를 적극 도왔다. 그후로도 오씨는 문씨에게 사업상 명목으로 여러 차례 돈을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문씨가 오씨와 결혼하기 전까지 빌려준 돈은 4억3천만원. 문씨는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적금을 해약하고 자신의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까지 받았다.
마침내 오씨와 문씨는 2002년 11월 결혼식을 올렸다. 겉보기엔 재벌가의 딸과 명문의대 출신의 엘리트 의사의 남부러울 것 없는 결합이었다. 그러나 양가 상견례와 결혼식에는 W사 회장이라는 오씨의 아버지와 친정식구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문씨가 이를 이상하게 여기자 오씨는 “사실 나는 재벌가의 숨겨진 딸이다” “아버지와 크게 다툰 후 가족들과의 왕래가 끊겼고 결혼식에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등의 말로 둘러댔다. 또한 W사가 한때 국내 대표적인 건설회사였지만 IMF 사태 와중에 파산한 뒤 사실상 문 닫은 회사여서 오씨가 여러 가지 변명을 대기도 쉬웠다.
결혼 후에도 사채업자들의 빚 독촉에 시달리던 오씨는 계속해서 문씨에게 돈을 요구했다. “가게 인테리어를 다시 해야 한다” “세금이 너무 많이 나왔다”는 등의 갖은 이유가 동원됐다. 그때마다 문씨는 은행 대출과 골프회원권을 매각하는 방법으로 오씨에게 돈을 빌려줬다. 이런 식으로 오씨가 문씨에게 빌린 돈은 모두 16억여원.
오씨는 문씨의 여력이 달리자 시어머니 김아무개씨(63)에게 손길을 뻗쳤다. 마침 시어머니 김씨가 몇 해 전 남편이 사망하면서 상속받은 재산이 많다는 점을 적극 이용했다.
2003년 12월 오씨는 김씨에게 “국세청 세무조사를 무마하기 위해 정치자금을 마련하려는 국세청 국장에게 돈을 줘야 한다”며 1억5천만원을 받아냈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사기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오씨는 “국세청 과장에게 뇌물을 줘야 한다” “국세청 간부에게 휴가비를 줘야 한다” 등의 명목으로 2004년 7월까지 무려 64억여원을 김씨로부터 빌렸다. 한 달에 평균 3억원 이상을 ‘뜯어냈던’ 셈이다.
오씨는 돈을 빌릴 때마다 “아버지가 평창동의 대저택에 살고 계신데 난 강남 요지의 고가 아파트 여러 채를 물려받을 것이다” “가족들과 화해하면 빌린 돈을 한꺼번에 갚아주겠다”는 말로 김씨와 문씨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이 같은 사기 행각은 오씨와 사채업자들과의 전화통화가 잦아지면서 들통나기 시작했다. 의심을 품은 문씨가 돈 문제를 추궁하자 오씨는 “당신의 사생활을 찍은 몰래카메라가 있다”며 오히려 문씨를 협박해 3억원을 뜯어냈다.
이 같은 다툼이 계속되던 가운데 사채업자들이 오씨를 고소하면서 이 희대의 사기극은 전모를 드러냈다. 그제서야 문씨는 오씨가 두 아이가 딸린 이혼녀라는 사실을 알았고, 명문여대를 나왔다는 것도, 재벌가의 딸이라는 것도 모두 거짓임을 알게 됐다. 하지만 문씨와 김씨는 이미 오씨에게 80억원 이상을 쏟아부은 뒤였다.
검찰 관계자는 “김씨와 문씨는 오씨의 말만 믿고 돈을 퍼다 줬다”면서 “W사쪽 사람들을 만나 확인만 했더라도 이런 황당한 사기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혀를 찼다. 이 관계자는 특히 오씨는 자신의 이혼 경력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문씨와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문씨가 이점만 확인했더라도 사기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현재 피해자 문씨와 김씨가 가장 의심스러워하는 부분은 오씨가 빌려간 돈 80억원의 진짜 행방. 이와 관련해 검찰 관계자는 “오씨는 그 돈을 모두 사채업자의 빚을 갚는 데 썼다고 하더라. 하지만 사채업자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상당액의 돈이 어디에 쓰여졌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오씨가 다른 곳으로 빼돌렸을 가능성도 있다”며 수사를 계속할 뜻을 내비쳤다.
‘재벌의 딸’ 행세를 해온 오씨는 외모는 평범했지만 언변은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진다. 오씨의 평소 언행을 보면 최상류층 여인임을 의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의외인 것은 이런 오씨에게 전과가 전혀 없었다고 점이다. 그렇다면 ‘초보 사기꾼’인 오씨는 이 같은 ‘재벌급’ 사기극을 과연 어떻게 구상하고 실행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사기친 거액의 행방과 함께 아직도 쉽게 풀리지 않는 또 하나의 미스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