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나무 죽자 ‘바꿔치기’ 눈 가리고 아웅
영국여왕 기념식수가 15년 전 고사해 다른 나무로 교체됐지만 안내판에는 그 내용이 적혀 있지 않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하지만 관계당국은 ‘죽은 나무’를 버젓이 산 것처럼 ‘위장’해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전시하고 있다. 현재 충효당 앞에 심어진 나무는 같은 수종의 다른 나무다. 기념식수 표지판과 하회마을 관광해설사의 해설 매뉴얼에는 여전히 영국 여왕이 직접 기념식수한 나무인 것처럼 거짓안내를 하고 있다. 어찌된 사연인지 그 내막을 추적했다.
“울타리 둘러져 있는 나무 보이시죠? 뭔가 대단한 나무 같아요. 저 가운데 나무를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이 심고 가셨어요.”
안동 하회마을 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은 관람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 기념식수 앞으로 삼삼오오 모여 들었다. 기념촬영을 마친 관람객들은 구상나무 앞에 있는 표지판을 들여다보며 다시 한 번 눈앞에 있는 나무를 확인했다.
표지판에는 “이 구상나무는 1999년 4월 21일 영국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가 전통과 문화가 살아 숨쉬는 안동 하회마을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심은 것이다”라는 글귀가 한글과 영문으로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 나무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이 심은 그때 그 나무가 아니다.
1999년 영국 여왕이 안동을 방문했을 당시 모습.
당초 영국여왕의 기념식수종에는 5가지 후보수종이 있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과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소나무, 하회마을 어귀의 터주대감이기도 한 느티나무, 추위에 강하고 고풍스러운 회화나무, 한국의 특산종인 구상나무가 그것이었다.
최종 기념식수종에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 전나무’로 불리며 크리스마스트리로 애용되는 구상나무가 물망에 올랐다. 한국 고유 수종인 구상나무는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할 때 옷을 걸어 놓는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한라산과 지리산 등에서 자생하는 구상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열매가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을 향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추위를 잘 견디는 힘과 전설 속 선녀처럼 우아한 수형을 지닌 구상나무가 영국 왕실의 품격에 가장 잘 부합한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결국 영국여왕 기념식수종에는 구상나무가 최종 선정됐다.
문제는 구상나무가 이식이 힘든 수종이라는 것이었다. 고산지대에 잘 자라는 구상나무를 평지에 심으려면 제반여건에 맞는 모래와 흙 등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사전준비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심은 큰 원통형의 구상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데는 큰 제약이 따랐고 곧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의 토양 역학조사 등 여러 조치가 이어졌지만 결국 영국여왕의 나무는 일 년 반 만인 이듬해 9월 고사하고 말았다.
이에 안동시는 비교적 살리기 쉬운 어린 구상나무를 강원도 영월에서 옮겨와 심도록 조치했다. 현재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 앞 구상나무가 이때 다시 심어진 나무다. 엘리자베스 2세가 심었던 잎이 무성하고 웅장한 크기의 구상나무는 아니지만 강원도 영월에서 옮겨와 심어진 어린 구상나무는 뿌리를 잘 내려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예전 구상나무는 원통형으로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지만, 현재 나무는 크기가 작아졌고 줄기가 보일 정도로 잎이 무성하지 않아 다소 왜소해 보이는 편이다.
안동시청 한 관계자는 “당시 기념식수를 담당했던 담당자들이 바뀐 관계로 자세한 답변은 어렵다”면서도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이 심은 나무가 고사하고 같은 수종의 다른 나무를 심은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이어 안동시청 관계자는 “구상나무 자체가 본래 지리산이나 한라산 같은 고산지역에서 자생하는 나무다. 자연 추위에는 강하지만 기념식수를 하기에는 까다로운 종이기도하다”고 덧붙였다. 애초에 기념식수 수종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먹구구식으로 수종을 선택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을 일반 관람객들이 알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기자가 안동을 방문한 지난 20일까지도 충효당 앞 구상나무 표지판에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이 심은 나무’라는 내용만 표기돼 있었다. 영국에 대한 외교적 결례는 물론이고 관람객들도 속이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한국관광공사 측이 교육여행 전문 여행사와 연계해 운영하는 프로그램의 해설사도 학생들을 비롯한 관람객들에게 ‘영국여왕이 심은 나무’라고 언급하는 것이 전부였다.
안동 도산서원의 ‘박정희 나무’도 2년 만에 고사해 다른 금송으로 대체됐다. 표지석에 그 사실이 적시돼 있다. 박은숙 기자
또 부시 전 미국 대통령(아버지 부시)이 부통령 때인 1982년 여의도 국회를 방한해 심었다는 ‘국회 기념 식수 1호’인 주목이 1년 만에 고사해 국회 내에 있던 다른 나무를 식재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회 측은 지난 2012년 11월 가짜 기념식수 1호를 뽑아내고 교체사실이 적시된 표지석을 새로 세우기도 했다.
이에 안동시청 관계자는 “도산서원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식수 표지판이 교체될 당시 내부에서 하회마을 영국여왕 기념식수 표지판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논의가 있기는 했다”며 “하지만 현재 충효당 앞에 있는 나무가 영국여왕이 심은 나무가 아니라고 해서 구상나무가 지닌 의미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영국여왕이 ‘기념식수를 했다’는 행위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로서는 표지판 교체 문제가 논의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안동시의 해명은 공무원들이 앞장 서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여행사와 연계해 안동 하회마을에서 해설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한국관광공사 측은 “여행사와 연계한 프로그램의 경우 자격증을 지닌 관광가이드 분이나 업체에서 자체적으로 해설 매뉴얼을 지니고 있다”면서도 “영국여왕 기념식수가 고사했다는 정보를 안동시와 공유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앞으로 한국관광공사에서 안동하회마을과 관련된 책자가 발간된다면 이 같은 사실은 반영해야 한다는 생각이다”고 덧붙였다.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스님은 “안동 하회마을은 선비문화의 요람인 곳이다”라며 “전통문화의 상징인 곳에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표지판이 있다는 것은 국민감사청구 등의 방법을 통해서라도 개선해야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