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권 각 계파에서 당의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인사들. 왼쪽부터 천정배 원내대표, 장영달 의원, 김두관 전 장관, 문희상 의원. 배경은 지난 1월 열린우리당 전당대회 전경. | ||
17대 국회 첫 정기국회가 국정감사 종료(10월23일)로 중반을 접어든 가운데 계파별로 차기 당권 장악을 위한 프로그램이 서서히 가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당내에선 차기 당권 경쟁이 지난 1월11일 전당대회 때와는 정국상황과 당내 역학구도가 크게 바뀌어 특정 세력의 독주가 어렵게 된 만큼 각 계파가 누구를 당 의장 후보로 내세우느냐와 합종연횡이 어떻게 이뤄지느냐에 따라 판도가 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지난 1월11일 전대에서 당권을 확실히 틀어쥐었던 당권파는 정동영 전 의장의 사퇴-입각에다 바통을 이어받은 신기남 전 의장마저 부친의 일본군 헌병 오장 복무 경력으로 낙마하면서 당권 재창출의 전망이 흐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천-신-정’ 중 아직 천정배 원내대표가 남아 있기는 하나 그마저도 4대 개혁과제(국가보안법 폐지-과거사 규명-사립학교 개혁-언론개혁) 입법의 성패 여하에 따라 중도하차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반면 비당권파를 형성했던 재야파와 개혁당 그룹은 당권파 퇴조의 반사이익을 향유하며 상대적으로 세 확산에 성공, 차기 당권 장악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재야파의 경우 이부영 의장 체제의 출범과 함께 사무처장 등 당 핵심 포스트에 자파 인사를 앉히는데 성공했고, 개혁당 그룹의 경우 기간 당원 요건 완화 논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대중적 지반을 강화하는데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다.
당내 권력지형이 이처럼 변화한 가운데 당내에서는 벌써부터 차기 당권 경쟁과 관련해 여러 ‘의미있는’ 동향이 포착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20%대 후반에서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있고, 특히 4대 개혁입법이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당 지도부 인책론이 조기에 불거질 가능성이 높아지자 각 계파의 움직임도 부산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차기 당권 경쟁과 관련해 당권파내에선 유일한 구심점이 되어 버린 천정배 원내대표의 당 의장 출마설이, 재야파 진영에선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의 ‘당 차출’ 주장이 나와 주목을 끌고 있다. 또 전대 투표권을 가진 기간당원을 상대적으로 많이 확보하고 있는 개혁당 그룹의 당권 후보 선택도 점차 가시권에 접어든데다 영남그룹 내에서도 “전국정당화를 위해서는 영남 출신 당 의장이 필요하다”며 김혁규 상임중앙위원을 내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친노 그룹 역시 그동안 청와대와 열린우리당간 불협화음 해소 차원에서 독자 후보를 내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져 차기 당권 경쟁은 이미 불붙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계파별 동향을 보면 우선 당권파에선 천 대표가 당권 도전의 뜻을 거의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천-신-정’ 트로이카 중 유일하게 이런 저런 구설에 시달리지 않고 역량을 보존해 온데다 본인도 최근 차기 당권은 물론 대권을 겨냥해 윤석규 원내기획실장 등 인력을 대거 보강해 눈길을 끌고 있다.
당내에서는 일단 천 대표가 이번 정기국회에서 최대 현안인 4대 개혁입법을 잘 해결할 경우 당권 행보를 본격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보법 폐지 대안을 당론으로 확정짓는 과정에서 천 대표가 전례없이 과단성을 보이며 내란죄를 개정한 형법보완안을 밀어붙인 것도 당권파라는 틀에서 벗어나 ‘선명 개혁’을 내세워 당내 기반을 넓히려는 계산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천 대표의 한 측근은 “천 대표의 향후 정치적 진로와 관련해 4대 개혁입법이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당내에서 ‘천 대표가 개혁입법에 올인하는 것 같다’고들 얘기하는데 맞는 말이다. 천 대표는 정기국회에서 입법이 좌절되면 당 안팎의 인책요구가 제기되기 전에 본인이 먼저 미련없이 원내대표직을 던질 생각이다. 만약 잘 풀린다면 17대 국회 첫해 원내대표로서의 소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만큼 보다 큰 뜻을 펴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혁입법을 성과있게 해결한다 해도 천 대표가 당권파의 단일후보로 옹립되리라 낙관하기는 어렵다. 당장 ‘천-신-정’ 등 당권파 핵심그룹에서도 천 대표가 원내대표에 이어 당권까지 거머쥘 경우 차기 대권 경쟁의 다크호스로 부상할 것이란 점을 들어 경계하는 분위기가 나온다.
특히 정동영 통일부 장관 진영에서는 차기 당권을 가급적 대권주자 보다는 ‘관리형’으로 가져갔으면 하는 분위기가 짙다. 정 장관측에서 영남그룹의 좌장이자 실용주의 그룹의 핵심인물인 김혁규 상임중앙위원이나 친노 그룹의 좌장격인 문희상 의원을 당권후보로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천 대표가 국보법 폐지를 둘러싼 당내 논란에서 조성태 조배숙 정덕구 김명자 홍창선 이계안 의원 등 ‘정동영계’로 분류되는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안개모) 소속 의원들과 심한 갈등을 빚었던 것도 정 장관 진영내 ‘천정배 당권 불가론’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재야파에서도 여러 중진들이 자천타천으로 당권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우선 재야파의 결사체인 국민정치연구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장영달 의원(4선)이 “차기 지도부는 당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상징하는 인사가 돼야 한다”며 출마 의사를 내비친 상태이고, 역시 4선인 임채정 의원도 저울질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야파 일각에선 4대 개혁입법의 정기국회 처리가 좌절될 경우 인책론으로 당이 급격히 흔들릴 것이 분명한 만큼 좌장인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을 ‘차출’해 당권 경쟁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주목을 끌고 있다. 김 장관의 측근인 한 의원은 “내각은 이해찬 총리가 확실히 자리를 잡고 있는 만큼 이제는 당을 실세화해 당정이 함께 참여정부 중반 국정을 힘있게 이끌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며 “향후 상황을 단정하기는 이르나 연말이나 내년 초에 여권 전체의 전열 재정비라는 차원에서 김 장관을 불러들여 당을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장관이 복귀하려 할 경우 ‘동반 입각’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의 형평성 문제와 대권가도 미칠 부정적 영향 때문에 ‘차출론’이 현실화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 당내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개혁당 그룹의 동향도 당권 경쟁 구도와 관련해 주요 변수다. 특히 이 그룹의 실질적인 좌장격인 유시민 의원은 얼마 전 몇몇 기자들에게 “내년 전대 후 당내 판도가 격변할 것”이라고 말해 관심을 집중시킨 바 있다. 유 의원은 “내년 전대에서 소위 ‘천-신-정’으로 대표되는 지금의 당권파들은 몰락할 것이다”고 예견했다.
유 의원은 또 자신의 당권 도전과 관련해선 “열린우리당을 만들 때 개혁당과 민주당 당원이 1대1로 합쳐졌기 때문에 내가 나가면 100% 당선될 것”이라고 호언하면서도 “그러나 당 의장은 외부 사람도 많이 만나야 하고 품격도 갖춰야 하는데 나는 품격이 없어 내가 당 의장이 되면 당이 망한다”고 말해 사실상 불출마 입장을 밝혔다.
그는 이어 개혁당 그룹 당권 후보에 대해 “김원웅 의원이 출마하는 방안이 유력하다”며 “지난 번 전대에선 정동영 의장이 60%로 1등하고 신기남 의원이 30%로 2등했는데 내년에는 40%만 받아도 1등을 할 것이기 때문에 개혁당의 승리가 무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개혁당 일각에서는 대중적 파괴력과 지지기반을 감안할 때 김원웅 의원보다는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을 당권 후보로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적지않아 관심을 모으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연수중인 김 전 장관은 이장과 남해군수를 지낸 일천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일약 여권 핵심 포스트를 맡은 입지전적 인물로 개혁성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또 개혁당 그룹의 결사체인 참여정치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김 장관 본인도 “다음 전대에선 지도부 진입을 노리겠다”며 적극성을 보여 향후 행보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계파색을 뚜렷이 드러내지 않았던 친노 그룹이 독자 당권 후보를 낼 지 여부도 주요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친노 그룹은 그동안 당권파가 득세하던 시기엔 비당권파와 보조를, 8월 중순 ‘이부영 체제’ 출범 후엔 주도권을 쥔 재야파-개혁당 그룹에 맞서 실용주의 성향을 표출하는 등 당내 세력관계에서 균형추 역할을 해 왔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친노 그룹 내에선 일단 문희상 의원의 당권 도전 여부가 최대 관심사다. 문 의원은 ‘관리형 대표’ 이미지에 적합한데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교감도도 좋아 당청 관계를 원만히 이끌 인물로 꼽힌다. 문 의원 본인도 최근 의원들과의 접촉기회를 늘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특히 10월 초 청와대 출신과 전직 장-차관, 지방자치단체장 출신들이 망라된 당내 최대 의원모임인 ‘일토삼목회(一土三木會)’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당권 도전 의사를 사실상 굳힌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내부에선 노 대통령이 ‘당정 분리’를 강조하고 있는 마당에 청와대 비서실장 출신인 문 의원이 당 의장을 맡는 것은 모양새나 당의 자생력 확보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적지않다. 때문에 ‘킹(King)’을 내기보다는 ‘킹 메이커’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으며 구체적인 카드로 한명숙 상임중앙위원과 김혁규 상임중앙위원이 거론되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